열심히 하지 않는 법을 모르는 당신에게,
“이것저것 잘하는 게 많으시네요” “아뇨, 그냥 좋아하는 게 많아서요.”
칭찬을 칭찬으로 제대로 받아들일 용기가 없는 나는 애매한 재능에 대한 칭찬을 오늘도 이런 식으로 받아치고 말았다. 어쩌면 대답마저 이렇게 애매한 걸까. 내가 가진 모든 재능들이 다 애매하다는 반증 같아 조그맣게 한숨이 나오는 건 다른 이야기겠지만.
어린 나를 만나러 거슬러 올라가 보자. 어릴 때의 나는 남동생과 비교했을 때 뭘 해도 우당탕탕 손이 많이 가는 애였다. 뭘 건드리기만 해도 고장내기 일쑤였고, 주변에 늘 친구들이 우르르르 몰려다녔으며 공부는 뒷전이었고 네발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 같은 것을 타고 다니며 무릎이나 팔 언저리에 생채기를 마구 내는 것을 개의치 않는 성격이었다. 어떤 날엔 짧은 다리로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보겠다고 용을 쓰다 뒤에 동생을 태운 채로 자전거에서 굴러 눈 옆에 누구도 모르는 상흔 하나가 남았으며, 아들 귀한 줄 아는 집안에서 자란 전형적인 K-장녀로, 무언가를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사춘기를 맞았다.
교우관계에서 한차례의 따돌림이 파도처럼 지나갔고, 그날 이후로 나는 앞머리를 커튼처럼 드리우고 그림자처럼 지냈다. 수군수군 친구들은 나를 이어폰 끼고 다니는 얼굴 하얀 애, 정도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단짝 친구는 나를 ‘천사처럼 착한 애’라고 떠받들었지만 왜인지 나는 잘 웃으면서도 늘 애매하게 우울했으며, 뭐가 그렇게 어두웠는지. 연습장 한 귀퉁이에는 별을 긋다 긋다 찢어져 버린 페이지가 여럿이었다.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 하나 못 하는 성격으로. “나 에이 할래,” 하는 단짝의 말에 “그럼 나도 그거 할래”라고 말하는 성격으로, 뒷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는 성격으로, 또 아무도 하지 않는 것을 해 두거나 소풍 때 혼자 쓰레기를 줍는 이른바 ‘자기 세계가 뚜렷한’ 소녀로 나는 애매한 유년기를 보냈다. 유일하게 뚜렷하게 좋아하던 피아노를 그만두고, (우리 집은 부유하지 않았으므로) 적당한 타협을 거쳐 인문계로 진로를 고쳐 잡았을 때, 학원 선생님은 내게 문예창작과를 권하셨지만 스스로를 토하는 데에 ‘글’을 도구로 사용했던 그때의 나는 그것이 옳은 방향인지도 가늠이 어려웠다. 그때에는 그저, 내가 어리기 때문일 것이라고. 조금 크면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
스무 살이 되자 서서히 인간관계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커졌다. 상업사진을 시작하면서 멈춰 있던 관계의 시계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씩 다시 명랑해지기 시작했고, 잘 웃고 잘 떠드는 덕에 누구에게든 쉽게 호감을 샀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못 했고 잘 거절하지 못했지만 그게 그렇게 큰 흠이 되지는 않았다. 그때 같이 커진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인정욕구였다. 머리가 조금 크니 내가 설 자리가 명확해졌고, 어느 것이 그럴싸해 보일지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스물셋, 넷, 그리고 다섯. 대학을 졸업하고 상업사진을 시작하고, 대학원을 입학할 때까지. 나는 무언가를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사람처럼 성과가 될만한 일은 닥치는 대로 해냈다. 그러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늘어났다.
포토샵 단축키를 내 몸처럼 익혔고, 꾸준히 글을 썼으며 전자책이 불모지였던 시대에 전자책으로 국가에서 주는 상도 수상해 보고, 누구나 말하면 알만한 곳에 신문기사도 내 보고. 이름을 알만한 학교에 출강도 해 보는 등. 성과, 성과. 성과. 내 20대의 전부는 성과에 매몰되어 있었다. 아는 인디 밴드의 커버 사진을 작업하거나 선거 후보의 사진을 찍어 전시를 했고, 대학원에 들어가 가장 어린 나이에 졸업논문을 써 석사가 되었으며 서른이 되기 전에 이미 1억을 모은 사람이 되었다. 나이가 차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했는데도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어째서였을까. 그건 한 번도 내 애매한 재능을,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석사 학위기를 받던 날, 오시기로 한 아버지가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계실 때였으니, 아마 늦여름이었나 보다. 그때 아버지의 병실에서 참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야 아버지께 제대로 된 제 모습을 보여드릴 때가 되었는데 “우리 딸 참 잘했네” 그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우셨는지. “그 칭찬, 해주셔야지 왜 여기서 누워서 이러고 계시느냐고.” 원망조로 말씀을 드렸는지 슬픈 어조로 말씀을 드렸는지,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30대 초반이 되자, 내게 남은 것은 적당한 돈과 좋아하는 것들. 그리고 그 좋아하는 것들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애매한 재능들 뿐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병원에서 조문객들에게 인사를 드리면서 아버지가 바깥에서는 내 칭찬을 그렇게나 많이 하셨다는 걸 알게 됐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었다. 만약 그 말들이 등 뒤가 아닌 내 귓가에 직접 닿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애매하다'는 이름으로 방치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전문직이 최고야 얘”
어느 날 어느 어른이, 내게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전문직이 무조건 최고인 시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물처럼 시대도 너올너울, 흐르고 있다. 무엇이 최고인지 최선인지, 그걸 굳이 규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나는 왜 무언가를 똑 부러지게 잘 해내지 못할까, 스스로를 탓하던 20대 후반의 내게 나는 이제야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애매한 재능, 아무것도 아닌데. 그게 또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닐 수도 있어. 얘.”
최근엔 피아노 학원에서 새로 시작하는 재즈곡의 악보를 프린트했다. 재즈 기본기를 다루는 데에 도움이 되는 악보인데, 한 번도 쳐보지 않은 lag time 장르 악보라 바로 칠까 말까 고민을 했었다. 재즈 리듬에 슬슬 재미가 붙고 있으니 이 정도 핑계면 아마 시작을 해도 완곡 정도는 가능하겠지, 싶어 호기롭게 구매버튼을 눌러버렸고, 바로 초견을 시작했다. 손가락은 생각보다 유연하게 움직였고, 생각보다 어렵잖게 완곡을 앞두고 있다.
올해 봄에 시작한 재즈피아노는, 내가 어렸을 때 배웠던 클래식 피아노와는 구조부터 리듬감이 완전 다른 친구다. 처음에 냅다 어려운 곡으로 시작을 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왔다. 알음알음 용어들을 찾아가며 검색하고 찾고, 적고 외우다 보니 이것 또한 애매한 재능이 됐다. 어딘가 써먹을 곳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손가락에 들어가는 힘, 이. 건반을 누를 때의 음이 나를 위로해 주니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좋아하는 것이 많아요, 하고 말할만한 것이 하나 더 늘었으니 또 열심히 똥땅똥땅 손을 굴려봐야지. 열심히 하지 않는 법을 잘 모르니 ‘애매한 재능’으로, 기꺼이 그리할 수밖에.
이따금 고개를 돌려보면 가끔 선명하게 보인다. 열심히 하지 않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 그래서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데도 "나 괜찮아" 하는 얼굴로 매일을 달음박질치는 사람들. 결국 하얗게 번아웃을 맞이하고서야 "나 그동안 참 애썼네" 하고 주저앉고 마는 그런 사람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당신이 겪은 그 좌절까지도 모두 '재능'이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잘하고 싶었던 마음, 어떻게든 잘 해내고 싶었던 마음, 그리고 이 지독한 현실을 기어코 유지하고 싶었던 그 간절함이 지금의 당신을 만들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