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하는 거지 뭐.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인생에서 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자란 내가 ‘케세라세라’의 마음가짐으로 매일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 ‘될 거면 되겠지’ 같은 마음이었지만, 재미있게도 그건 체념과는 결이 조금 많이 다른 무엇이었다.
“가능한가요?”라고 제안을 받으면 늘 예스맨이 되는 순간을 스스로 만들곤 했다. “네, 한 번 해보죠.” 호기롭게 대답했었다. 지금도 그러고 있고. 자신감이 넘쳐서라기엔 아는 것이 늘 부족했고, 인생 만렙이라기엔 항상 어딘가 어설펐다. 그런데도 일상에서, 일을 대하는 마음에서 그냥 ‘치받기’를 선택한 것은 겪지 않으면 그 세계에 대해 경험치가 쌓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경험치는 사회생활의 치트키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게는 잘 갖추어진 ‘사회성’만큼이나 중요했다. 경험치가 쌓이면 쌓일수록 그 일에 익숙해질 수 있고, 익숙해져야 내 루틴을 만들 수 있었다. 루틴을 만드는 것은 중요했다. 어떤 것의 루틴을 잘 갖춰 두면 무슨 사이클이든 원활했다. 잘 작동하는 시계처럼. 똑딱똑딱 할 수 있는 루틴이 늘어나면 거기서 큰 만족을 느끼는 내가 있었다.
지금 일하는 카페에서 처음으로 설거지를 시작했을 때도 그랬다. 나는 그저 하루에 네 시간씩, 일주일에 여덟 시간 그릇을 씻어 정리하기만 하면 되는 파트타이머 일을 할 뿐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물이 찬 쇼케이스 물받이가 보였고, 병음료가 빠진 자리가 보였고, 베이커리가 비면 그 틈새가 보였다. 제빙기의 트레이에 물이 가득 차면 그 물을 비우는 일도 기꺼이 했으므로, 서서히 ‘보이는 것들’을 루틴으로 만드는 것을 해내는 매일을 마주했다. 트레이에 어느 정도의 물이 찼는지 보지 않아도 가늠이 가능했을 때엔, 들지 않아도 무게를 알 정도로 익숙해졌다. ‘첨벙’ 하고 싱크대에 가득 찬 스테인리스 트레이 안의 물을 쏟아버릴 때엔 경쾌한 소리에 마음까지 시원해지곤 했다.
정해진 시간까지 그릇을 정돈하고 나면 디테일한 부분을 정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내게 여덟 시간은 자잘한 루틴으로 꽉 찬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 위안을 얻었고, 잘 정돈된 그릇들 사이에서 성취감과 행복을 느꼈다. 스타벅스에서 늘 강박에 치이다 처음으로 느끼는 평온함이었다.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시간, 내가 좋은 대로 할 수 있는 업무, 누구나 반기는 내 방식의 ‘정돈’. 그것으로 채워지는 ‘아, 여기는 내가 있어도 될 곳이구나’라는 만족감까지. 그 만족감이 자연스레 내 업무 시간을 늘어나게 했고, 여덟 시간에서 열여섯 시간으로, 열여섯 시간에서 ‘파트타임 바리스타’ 제안을 받으면서 스물네 시간 일을 하기까지의 단단한 뿌리가 되었다.
“아, 되면 하죠 뭐.”
입버릇처럼 하는 이야기다. 하면 되는 게 아니라 그냥 되면 하는 거라고. 안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부분까지 긍정하는 태도. 어쩌면 진작 나는 이런 태도로 삶을 받아들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해보고 안 되면 말고, 그치만 하면 되겠지 뭐, 하는 ‘될 대로 되라’라는 마음가짐. ‘한 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은 결과가 어떻든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에 후회를 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회비용이 당연한 삶 속에서 어찌 되었든 스스로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삶의 마음가짐은, 내가 무언가를 싫어하고 좋아하는지를 확실히 알게 하기도 하니까.
슬슬 봄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3월, 최근에 새로운 경험들을 할 일이 많았다. 새로운 책의 출간 계약, 글을 쓰시는 작가님들과 함께하는 공동 매거진, 경기문화재단 작품 출품까지. 앞으로도 이런저런 일들을 바지런히 준비하고 있다. 많은 것들을 읽고 쓰며 따뜻한 계절을 나면,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는 계절 즈음에는 또 새로운 루틴들이 내 곁을 가만히 지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내가 어떤 새로운 일들을 만나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하면 된다’가 아닌 ‘되면 한다’의 마음가짐으로 즐겁게 해보고 싶다. 해내고 싶다. 아님 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