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의 질량으로 이어지는 연(緣)
삶을 지내며 참 많은 연을 쌓았다. 물론 지금은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연도 있고, 그냥 흩어져버린 관계도 있다. 다 말리지 않은 김밥처럼 스르르 풀려버린 사이도 있고. 확실한 건 만나질 사람은 다시 만나지고 이어질 연은 부드럽게 테누토처럼 이어진다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내가 힘을 주지 않아도 저절로 모든 것들이 그리 이루어져 왔다. 40대가 되고 나서는 크게 힘을 주지 않아도 내게 머물다 갈 사람, 머물지 않아도 될 인연, 잠시 스쳐 갈 사람이 확연히 보이기 시작했다. 적당히 에너지를 배분할 수 있게 되었고 스트레스도 점차 줄어들었다. 올 사람은 막지 않고, 갈 사람은 붙잡지 않았다. 잦은 연락에 서툰 나는 특별히 먼저 연락을 취하는 일을 자주 하지 않았다. 카카오톡으로 주고받는 메시지도 어느 순간 불편해졌다. 너무 많은 말을 주고받고 나면 피곤해졌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네모창에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해야 하는 것에 지쳤던 시기도 있었다.
일을 그만두고, 하루가 멀다 하고 울려대는 스팸메시지에도 익숙해질 즈음. 알고 지내던 지인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을 받았다. 어렵사리 퇴사를 했다는 메시지였다. 많은 고통과 인내 속에서 결정한 일이었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진심으로 잘한 일이라며, 축하의 답장을 보냈다. 이미 끊어져버린 관계 때문에 알게 된 묘한 인연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나도 모르게 마음이 많이 갔던 사람에게서의 선톡. 계절이 몇 번 지나면 한 번쯤. 건강에 관한 것을 묻거나 인사를 하는 것이 다였던. 그런 지인에게서 온 연락이었고 사실 특별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 집으로 반가운 선물이 도착했다. 퇴사를 했다는 그 친구가 도쿄로 여행을 갔다가 내 생각이 났다며 사 온 마음을 선물 받은 것이다. 고양이 모양이 그려져 있는 귀여운 초콜릿 쿠키였는데, 어째서인지 휑한 연말. 그 선물이 내 마음을 무엇보다도 따뜻하게 덥혀서, 무해하게 행복해지는 순간을 마주했다. 이후 바깥에서 책 향기를 맡으며 그 사람을 우연히 다시 조우하게 되었고 짧지만 긴 대화를 하며 '결'이 맞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는 서점에서 만나서 서점에서 헤어졌다. 이전에 바깥에서 만났을 때도 서점에서 마지막 발걸음을 떼었던 것이 떠올라 속으로 웃었다.
예쁜 이름을 가진 그 사람은,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고 독특한 음악을 찾아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언어 능력이 탁월해 영어와 일본어를 둘 다 잘하는 능력자였다. 감성적이었지만, 이성적이기도 해서 내가 갖지 못한 부분을 갖고 있었고 머리가 좋고 똑똑해 무엇이든 흡수가 빠른 사람이었다. 보석 같은 매력을 지닌 이라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잠시 나를 잊는 순간도 있었다. 나이가 열 살 넘게 차이 났지만 관계에는 별로 영향이 없었다. 우리는 이야기가 잘 통했고 만나면 시간을 보지 않고 대화를 나눴으므로. 그 만남 이후로, 희한하게도 연락하는 횟수가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우리는 주로 좁은 네모창에서 대화했다. 가끔은 고민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본 공연에 대해, 전시에 대해 메시지가 날아왔다. 나는 좋은 것을 보면 메시지를 보냈고, 그 사람도 기꺼이 그리 했다. 화나는 일이 있으면 아무렇잖게 연락을 하기도 했다. 꽤나 신선한 경험이었다. 이전의 나는 그런 일들을 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과거의 일들을 친구에게 ‘그랬다’ 며 이야기했던 적은 있지만, 현재 진행형의 일들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으므로 무척 생경한 일이었다.
어느 날부터는, 서로 책을 큐레이션 하기 시작했다. 둘 다 책을 좋아했기 때문인데, 좋은 책이 있으면 ‘읽어보세요! ’하고 갑자기 선물을 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선물을 받고, 주는 날들이 이어졌다. 위로가 필요한 밤엔 위로 한 마디를 놓거나, 뒤서거니 받거나 하는 방식으로 대화가 끊어졌다가, 잠시 멈춤 버튼을 누른 듯 다시 한마디에 대화가 재생되었다.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좋은 에너지가 돌았다. 이야기가 통하는 좋은 사람과 하는 대화도 그럴 텐데 무엇보다 '대화'가 되는 사람과 함께 나누는 책 이야기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귀한 책 선물을 주고받는 친구라니. 얼마 전에는 이 친구에게 넌지시 이런 관계가 참 좋다고, 오래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느슨하게 고백했다. 은근하게 따뜻하게 오래 지속되는 주전자 안 물처럼 은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장 최근엔 강영숙 님의 라이팅 클럽, 이라는 소설책을 선물 받았다. 감사인사를 하면서, 나는 또 어떤 책을 선물하면 좋을까 고민했다. 고민을 하는데 괴롭지 않다니. 오히려 즐겁다니.
새로고침을 하는 기분으로 나는 또 이렇게 인연 하나에 소중함 한 스푼을 얹는다. 어떤 인연은 내게 모르는 새 흉터를 남겼고, 어떤 사이는 보이는 곳에 깊은 찰과상을 새기기도 했지만 이런 무해한 관계가 나를 단단하게 지켜주는 한 앞으로도 나는 무엇이 어떻든 다 괜찮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책 몇 권의 질량이 쌓을 앞으로의 선한 연이 더 깊어질 수 있도록. 많이 읽고, 또 많이 써야겠다고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조용히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