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5] 이름은 잊어도 이미지는 새로고침 되지 않아서
모든 인연에는 유통기한이 있다고 믿는 고집 센 운명론자에게도,
가끔은 시스템 오류 같은 다정한 재회가 찾아온다.
"어, 혹시?"
설거지를 하다 잠시 장갑을 벗을 기세로 소스라치게 놀란 오후 여섯 시 반.
스타벅스 퇴사가 1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 새로 일하고 있는 카페에서 옛 버디를 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오후였다. 목요일이었고 새로운 분이 입사하신다고 했다. 앞치마를 둘러메고 텀블러를 들고 블랙이글 앞에 섰는데 못 보던 분이 서 계셨다. 같이 일하던 크루분이 가볍게 내 소개를 대신해 주셨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하고 해사하게 웃었던가, 사실 기억나지 않는다.
그분은 매우 정중한 애티튜드를 지니신 분이었고, 무언가 하나를 해도 두 세 배의 에너지를 들이시는 것 같아 보였다. 안경 사이로 뻘뻘 땀을 흘리시는 게 보일 것 같은 이미지였다. 홀을 체크하실 때도, 새로운 것을 배우실 때도 기꺼이 몸을 숙이시는 편이었고 나는 그런 겸손함이 굉장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대처하는 자세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분의 처음은 '정중함'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잰 듯 반듯하고 묵직했다. 한편으로는 어떤 부분이 그분의 정중함을 저 정도 텐션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기능하는 걸까 싶어서 나도 모르게 경건해지는 순간을 만나곤 했다. 미지의 세계에 대처하는 누군가의 태도를 보는 것은 묘하고 신기하면서도 굉장한 일이다.
우리 매장은 여섯 시가 되면, 메인 '매출거리'인 브런치를 마감한다. 그날은 마감 업무를 배우시는 그분의 뒤에서 달그락달그락 평소보다 많은 설거지거리를 해내던 중이었다. 세제를 묻히고 거품을 보글보글 만들다가 맥도날드에서 크루를 하셨다는 그분의 이야기가 언뜻 들려 나는 잠시 틀었던 물의 수도꼭지를 닫고 뒤돌아 물었다.
"와, 맥도날드에서 크루 하셨어요? 굉장하시네요!"
그분은 잠시 당황하시는 듯싶더니 별 거 아니라며 헤헤 웃어 보이시기에, 나는 "저는 맥도날드는 아니지만 스타벅스에서 일을 좀 했어요!" 하고 대답을 했더랬다. 그랬더니 잠시 그분이 내 미간을 아주 심도 깊게 쳐다보시는 것이 아닌가, 다시 거품새로 돌아가려던 내 발걸음이 잠시 방향을 잃고 멈춰 섰다.
"어...?"
"네...?"
"저... 혹시, 이 쇼핑몰 내 스타벅스에서도 일하신 적이 있나요?"
어라?
신선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실제로 쇼핑몰 내 스타벅스에서 1년 반 정도 근무 경험이 있었기에, 그분께 사실대로 말씀을 드렸었고, 그분이 한때는 있었다가 없었던 쇼핑몰 내 음식점 이야기를 꺼내셨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예....?"
신기하게도, 없어진 그 음식점은 내가 파트너 시절 굉장히 좋아해서 자주 찾았던 곳이었다. 단골이라고 말하기까지는 그렇지만, 그래도 갑자기 그곳이 폐점했을 때 못내 마음이 쓸쓸했던 경험이 겹쳤던 것이 기억났다. 스테이크를 파는 가게였는데, 뜨거운 돌판에 올려 늘 지글지글- 구워지는 상태로 나와 원하는 굽기로 익혀 먹을 수 있어서 쉬는 시간이 길면 꼭 갔었는데. 그분은 그곳의 직원이셨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나는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앗, 그럼 몇 번 손님으로 인사드린 적이 있겠네요!"
그랬더니 더 의외의 대답이 돌아오는 것 아닌가.
"혹시, 닉네임 어떤 거 쓰셨어요? 제가 뵌 적이 있는 것 같아서. 음료 사러 자주 갔었거든요. 밝은 분이셨어요. 아무래도... 맞는 것 같은데요."
어라?
나는 몸을 돌려 그분을 정확히 쳐다보았다. 매장에 새로 들어오신 그분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확실히 언젠가 어디에선가 뵌 것 같은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아. 내가 인사드린 적이 있었던 버디구나. 맞구나!
"어? 고객님?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급작스레 덮친 반가움에 나는 큰 목소리로 쾌활하게 인사를 한 뒤 장난스레 몸을 90도 숙였다. 너무나도 유쾌하고 즐거운 순간이었다. 몇 년 전 일인데, 나를 기억하는 버디분이 계시다는 사실조차 놀라운데 심지어 그분을 직장에서 다시 뵙게 되다니. 그것도 카페에서, 말이다.
그분은 당황스러워하시면서도 나를 따라 허허 웃으셨다. 그 스테이크 가게에서 일할 때 종종 음료를 사러 스타벅스를 들르셨다고 했다. 그때 밝은 에너지 때문에 기억에 남는 파트너가 있으셨다고 했고, 그 파트너가 나인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기가 막힌 우연이, 기분 좋은 우연이 어디에 또 있을까.
스타벅스 퇴사를 한 지 1년이 다 되어 간다.
가끔 매장에 들르셨던 버디분들을 생각하면 이제 매장 바깥에서는 뵐 일이 없겠지, 하고 생각한 적이 여러 번이었던 게 사실이지만, 직장에서 옛 버디를 뵙고 나니 생각을 새로고침하게 된다. 아 인연은 신기하고 어디에서건 누군가를 마주칠 수 있구나. 내가 전해받았던 스타벅스 시절의 따뜻함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듯, 내가 아직도 떠올리고 있는 언젠가의 버디님들이 소리 없이 행복하시기를 바라게 되는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