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우울하고 예민한 내가 죽기라도 바라는 것처럼> 플레이리스트
방 안이나 아침 하늘에서 우연히 보게 되는 어떤 색이나 한 때 무척 좋아했기에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는 향수라든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우연히 떠오르는 시의 한 구절이라든가, 이제는 연주하지 않는 음악의 한 소절들.
도리언, 내가 감히 말하지만 우리 삶을 지탱해 주는 건 바로 이런 것들이오. 브라우닝도 어디선가 바로 이런 것에 대해 썼죠. 우리 자신의 감각으로도 그런 게 어떤 건지 상상할 수 있소.
하얀 라일락 향기가 갑자기 코끝을 스치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그런 순간이 되면 나는 또다시 내 인생에 기묘한 한 달을 살아야 하는 거요.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더클래식)
누구에게든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마치 과거의 어느 때를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때마침 그날을 떠올리게 하는 날씨에다, 당시 들었던 노래가 들려와 당장 그 시기를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때 말이에요.
저는 그런 때 완전한 평화를 느껴요. 그게 설령 행복하고 애정 넘치는 감정이 아니더라도, 그건 분명 어떤 평화일 거에요. 시끄러웠던 마음속이 고요해지고 마치 피부로 호흡하는 것처럼 공기의 결을 느끼는 데에 온통 집중하게 되니까요. 평화가 아니라면 그 감각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오늘 저는 메르헨님의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다시 한번 <마치 우울하고 예민한 내가 죽기라도 바라는 것처럼>을 한 글자씩 읽었습니다. 몇 달 간의 제작 과정을 거치면서 원고를 거의 외우다시피 했기에 독서를 위해 이 책을 다시 집어 든 건 처음이었어요.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그런 감각을 다시 느꼈습니다.
모든 요소들이 하나로 뭉치되 서로 간섭하지 않고 부유하듯 혹은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듯한 그런 상반된 감각을요.
어쩌면 바로 이런 순간들을 위해 저는 글과 그 너머의 온갖 것들을 한데 묶어보기를 꿈꾸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