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쪽이야?)
헌법 제10조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 추구권):
•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헌법 제12조 (신체의 자유):
•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구속·압수·수색 또는 심문을 받지 아니하며,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보안처분 또는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
헌법 제17조 (사생활의 자유):
•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헌법 제15조 (직업의 자유):
• 모든 국민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가진다.
헌법 제21조 (표현의 자유):
•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참고: 헌법 제37조 제2항은 자유와 권리의 제한에 대한 근거를 명시한다.
자유권 제한은 국가 안전 보장, 질서 유지,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 법률로써 제한될 수 있다. 하지만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은 침해될 수 없다.
자유권 제한의 요건:
• 실질적 요건: 국가 안전 보장, 질서 유지, 공공복리라는 정당한 목적을 위해 제한되어야 한다.
• 방법상의 요건: 필요한 경우에만 제한되어야 하며, 과잉금지원칙에 위배되지 않아야 한다.
• 형식적 요건: 법률에 근거하여 제한되어야 한다.
(헌법-구글 검색: 문제시 삭제하겠습니다)
나는 어느 한 만화책을 본 적이 있다. 어렴풋한 기억에 그 책에는 공산주의자가 자신의 지역에 오면 “공산주의가 좋아요”라고 하고, 자본주의자가 자신의 지역에 오면 “자본주의가 좋아요.” 라는 문구를 써서 자신의 없는 다리 밑 판자를 둔 그림이었다.
전쟁은 그러하다. 사람의 천부인권을 혼돈시킨다. 막상 전쟁이 나면 대가를 지불함 없이 마트의 음식들은 모두 동이 날 수도 있다. 그때가 되면 돈은 필요 없을 것이고, 모든 이들의 삶 또한 평준화 될 것을 나는 어렴풋이 짐작해본다. 모두 같이 타임워프해서 원시시대로 회귀하는 상상을 해본다. 6.25. 전쟁을 겪었던 분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이렇게 이르신다. “전쟁이 또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라고.
2025년 8월 1일 헌법을 읽으며 이 곳,대한민국, 휴전중인 전쟁터에서 글을 쓴다. 누군가는 살기 급급해 자신의 자유를 누군가에게 전가 하도록 만든 것이 오히려 자본주의라고 말 할 수도 있다. 내가 노력한 만큼 얻지 못할 때가 더 많아도 나는 자본주의가 그리 밉지 않다.
옛날, 나에게 질투를 하던 이가 이렇게 말 한 적이 있다. “너네집은 부자라서 그렇잖아. 다가졌잖아“ 내가 7살 무렵 나보다 6-7살 많은 남자애한테 들었던 이야기였다. 나는 내 얘기를 하는 대신에 그 친구의 이야기를 주로 들어줬었다.
그 당시 한참 뉴스에서는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탈옥을 해 세상을 헤짚고 다닌다는 방송을 했었다. 그 당시 티비가 없었어서, 나는 성인이 되어서야 그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고 불운한 학창시절을 보내 그렇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나는 다시금 반추해본다. 남들이 말하는 부자라는 기준이 과연 나에게 얼마큼 나에게 용인될 수 있을까를. 남의 천부인권을 해하면서까지 자기 인생을 망치고 싶은 이는 없을 것이다. 어느 시점에서 어떤 절제가 생겨야 할까? 남의 것을 탐하는 것을 성선설, 성악설의 기질로 받아들인다면 가정환경이나 생활환경은 변수로 작용할 수 없지 않나 싶다.
스스로 결론 내리길 성무성악설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에게 고민을 토로한 그 사람은 지금 쯤 성인이 됐을 것이고 탈옥수 또한 형이 끝나 옛날처럼 그렇게 악한 이도 아닐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다만 남들보다 깨닫는 시점이 늦었을 것임을 추측한다.
돈으로 시작해서 돈으로 끝나는 자본주의는 출발선이 동일하지 않다. 누군가는 그 돈을 선대에 쌓아 놓아 손쉽게 노동층에서 제외됬을 수도 있다. 그런 그들을 나는 질투하지 않는다. 삶이란 끝까지 달려보아야 하니까. 나는 빨리 어른이 된 시간 만큼 단단해졌다.
한국을 구성하는 자본주의가 악한가? 선한가를 따지기 전에 그를 다루는 사람의 기질, 가정환경, 사회환경을 고민해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이는 부유하게 살아 평생을 가난을 모른 채로 살 수도 있고, 형편이 좋지 않아 꿈을 꾸기 조차 힘든 상황에서 극적으로 가난을 탈출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병에 걸려 치료비가 걱정이고 또다시 집안에 한 사람만 아파 가정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돈을 벌려고 생업에 뛰어들었을 때, 그 시장이 포화상태여서 미끄러지는 경우를 나는 직/간접적으로 보고 자랐다.
나는 돈 많이 벌어야한다는 생각보다, 그 사람과 내가 존재하는 시간, 공간이 똑같은가가 궁금했다. 신문 속 세상에는 이런 존재가 있구나 싶어서. 인터뷰에 누구 덕에 성공했냐고 누군가에게 물었을 때, 운이 좋았다라는 대답을 어디선가 보았다. 잡지에서는 수많은 인생 스토리를 보았다. 그러다가 성공한 사람들의 교집합이 보였다. 근면성실함, 자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선함. 이 삼박자가 맞아야 대대손손 그 덕을 물린다고 생각한다. 부가 쌓여있어도 누군가는 질투가 나서 그를 끌어내릴 수 있기 때문에 늘 행동가지를 조심히 하라는 말씀들을 알게 모르게 배웠던 것 같다.
그러한 덕이 있는 자는 일찍의 자신의 인생이라고 깨닫는다. 그들은 효율적으로 산다. 누군가를 깎아 내리는 것보다, 자신에게 집중해 달리기 시작하여 누구보다도 빨리 성공가도를 달린다. 별자리가 이어지듯 그들의 발자국이 남은 것이 자본주의라고 생각한다. 하이라케처럼 교육의 길은 정해져 있지만, 막상 사회에 나오면 그렇지 않다. 직업이라는 수많은 별의 연결 곡선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그림으로 그려 표현하고 싶다.
그러한 덕을 물려주는 자는 누군가와 같이 걸을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자라고 나는 그렇게 정의한다. 가난한 내가 마음이 부유한 이유가 적이 없어서다. 무슨 일이 있으면 나는 내가 총대를 맨다. 내 분야라서 내가 해결할 수 있으면 혼자서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해 나간다. 그렇기에 나는 늘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인맥도 마찬가지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인맥을 부러워하느니 차라리 내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아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굳이 내 위신을 세우고자 남에게 지속해서 허황된 말을 하는 사람은 쳐다도 안 본다. 굳이 나를 포장할 이유가 있을까? 어깨가 펌핑되어있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이해를 하지 못한다.
대신 나는 내가 늘 인복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내가 어렸을 적 일찍 내 복을 알았던 이유는 주변의 사람들이 선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우리반이나 우리조는 단합력도 가장 좋았다. 주도하지 않아도 나에게 사람들이 모였다. 아이디어를 내 팀프로젝트를 하면 나는 끝발이 없어서 초장에서 진을 빼 나가떨어지는데, 그나마 팀원들이 있어서 끝까지 해 냈던 기억이 여러번 있다. 다 같이 걸었을 때 나는 내 페이스를 유지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남들의 걸음보에 맞춰 걷기 때문에, 숨을 고르며 조금은 천천히 또는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정신력을 어린시절 갖췄다고 생각한다.
할아버지가 아프셔서 요양을 하셨었다. 늘 그의 머리맡에서 쫑알거렸던 나는 나의 노년을 많이 그렸던 것 같다. 돌아가실 무렵, 나는 깨달았다. 삶이 덧 없음을. 말수가 적어지고 적어진 만큼 야물어졌다. 그 당시 ”아홉살 인생“이라는 책이 유행을 했고,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갈매기의 꿈”등의 책을 많이 보았었다. 어린아이가 이해하기 힘들거라며 책을 주저하시던 어머니를 졸라 그렇게 하나 둘씩 책을 쌓아나갔다.
조나단이 하늘을 날면서 그려냈던 이상과 자유를 지향한 나의 꿈이 맞물려 돌아간다. 누군가 뽀르뚜까 처럼 내 어깨위의 짐을 덜어주길 바라지않는다. 같이 걷자는 이들에게 내 짐을 보여주기도 싫다. 그냥 묵묵히 같이 있고 싶다. 나이가 든 나에게 그들이 적대감을 표현해도, 나는 다음대를 보호하기 위해 함께 웃을 것이다. 굳이 내가 낳지 않아도 내 애로 이제사 보인다. 울고 웃고, 나도 그렇게 컸으니 그 아이들도 대를 이어 그리 자랐으면 싶다고 생각하며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