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였다. 해가 지기 직전, 거리의 공기가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았다. 공원 벤치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옆에는 반쯤 비워진 커피 캔이 놓여 있었고, 벤치 앞의 오래된 은행나무들은 바람에 맞춰 잔잔히 흔들리고 있었다.
“왜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까?”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 공기 속에 흩어졌다. 나뭇잎들이 바람을 따라 가볍게 움직였다. 남자는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중얼거렸다.
“그들은 서로를 느끼는 거야.”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람이 잎사귀를 스치는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이 귀를 간지럽혔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건 흐름에 자신을 맡기기 때문일까. 부드럽게 움직이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건지도 몰랐다. 남자는 그 생각에 잠기며 오래전 기억을 꺼내 보았다.
겨울이 막 끝난 어느 날이었다. 바람이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있을 무렵, 그녀와 함께 이곳을 걷고 있었다. 그녀는 나무 밑에 서서 작은 가지를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바람이 불면 나무가 춤추는 것 같아.”
“춤?”
“응. 나무는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람이 오면 움직이잖아. 마치 바람이랑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지 않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웃었다. 그 모습이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무심코 말했다.
“나는 왜 그렇게 살지 못할까.”
“그렇게라니?”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나무처럼. 억지로 버티지 않고 흐름에 맞춰 사는 거.”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답했다.
“버티는 것도 나쁜 건 아니야. 나무가 바람을 이겨내지 못하면 뿌리가 뽑혀버리잖아.”
그 말이 오랫동안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버틴다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그에게는 버티는 일이 더 힘든 일이었다. 마음을 비우고 흐름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면, 그녀와의 관계도 어쩌면 달랐을까.
눈을 떴다. 은행나무는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가지와 잎이 바람에 맞춰 움직이며 서로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내가 조금만 더 자연스럽게 살 수 있었다면…”
그는 조용히 입술을 떼었다가 삼켰다. 그랬다면 지금의 삶은 조금 더 편안했을까. 버티려고 애쓰지 않고 흐름에 몸을 맡겼다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뿌옇게 물든 하늘 사이로 바람이 다시 불었다. 그의 옷자락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무가 흔들리는 것처럼,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 나갔다.
바람이 그의 뒷모습을 따라 불어왔다. 나무들이 조용히 움직이며 다시 대답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