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

by someformoflove

그런 순간이 있다.

아무렇지도 않던 것이, 한순간에 전부가 되는 찰나.

그 순간이 찾아온다.


그날 밤도 평소와 다를 것 없었다. 가을의 끝자락이었고, 겨울이 오기 직전, 바람은 어느새 차가워졌지만, 아직은 매서운 추위가 오기 전의 날씨였다. 몇 해 동안 반복된 이 계절의 냄새와 분위기는 어느새 익숙해졌다. 마음속에서 뜨겁게 일렁이던 감정의 물결들은 잔잔해졌고, 가슴을 울리던 어떤 것도 크게 반응하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그녀는 오래된 친구였다. 몇 년을 함께 웃고 대화를 나누며, 나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던 사람. 우리 사이엔 특별한 기류도 없었고, 굳이 이름 붙일 필요 없는 감정들이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날 밤 역시 별다를 것 없는 만남일 거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근황을 묻고, 때로는 농담을 던지며, 밤은 흘러가고 있었다. 평범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런 시간이었다.


”바람이 제법 차네. “ 그녀가 옷깃을 여미며 말했다. 그 순간, 무엇인가 달라졌다.


가을바람이 조용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고, 가로등 불빛 아래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 짧은 순간,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했다. 나는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마치 눈앞의 세상이 흐릿해지고, 그녀만이 선명해진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던 익숙한 존재가 그 순간 내 마음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낯설고 강렬한 감정이 밀려왔다.


”뭐 해? 추워서 그런가, 멍하니 있네? “ 그녀가 나를 향해 웃으며 물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녀의 목소리였지만, 내 귀엔 다른 톤으로 들렸다. 익숙했던 모든 게 그 순간부터 낯설게 다가왔다. 그저 ’ 친구‘라는 틀 안에서 보았던 그녀가 아닌, 내가 몰랐던 다른 존재로 서 있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말을 삼켰다. 내 안에서 어떤 감정들이 어지럽게 뒤엉키고 있었다. 눈앞의 사람이 예전과는 다른 의미로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그 혼란과 동시에 밀려오는 뭔가 깊은 울림.


우리가 앉아 있던 작은 카페 창 너머로, 잎을 거의 다 떨군 나무들이 서 있었다. 잔잔히 흔들리던 나뭇가지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리창을 타고 들려왔다. 그리고 그 찰나, 나는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 변화는 돌이킬 수 없었다. 익숙하던 가을의 밤이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 나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이미 나 자신에게는 그 말이 설득력이 없었다.


그날 밤 이후로,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길을 걸을 때 그녀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 한마디, 작은 제스처, 모든 것이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마치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그 짧은 순간에 새롭게 채색된 듯, 세상이 다른 빛깔을 띠기 시작했다.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찾아오듯, 그 찰나의 순간은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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