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혼주의자예요

by someformoflove


“나는 비혼주의자예요.”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 그녀가 내게 했던 가장 강렬한 이야기다. 아무런 망설임도, 설명도 없이. 그 한 마디는 단순한 자기소개처럼 들렸지만, 동시에 그녀가 세상에 선언하듯 내뱉은 말 같았다. 나는 그 순간 웃어야 할지, 놀라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사실, 내가 그녀와 소개팅을 하게 된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첫사랑과의 긴 연애는 내게 많은 것을 남겼다. 설렘과 행복, 그리고 마지막에는 상처와 피로까지. 결혼을 꿈꾸며 함께했던 시간들이 결국은 큰 사건 하나로 무너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결혼’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얼어붙는 사람이 되었다. 결혼은커녕 사랑이라는 감정조차 내게는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자연스럽게 비혼주의라는 선택은 내 삶을 지탱하는 철학이 되었다.


그런 내가 그녀와 만나게 된 건 친한 동생의 권유 때문이었다. “형, 결혼은 아니더라도 그냥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형에게 좋을 거예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그녀를 소개했다. 그녀에 대해 아는 건 많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나이대, 직업은 안정적이고, 무엇보다도 결혼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결혼은 아니더라도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아무런 기대 없이, 아니 어쩌면 그 기대 없음을 방패 삼아 그녀와의 소개팅을 덜컥 받아들였다.


만남은 뜻밖에도 빨리 이루어졌다. 내가 그날만큼 솔직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첫사랑 이후로 나는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을 경계했다. 하지만 그녀와의 만남은 달랐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잃을 것도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나는 어쩐지 나답지 않게 진솔한 말투와 과감한 추진력으로 그녀와의 첫 만남을 이끌어갔다. 그리고 그날, 카페의 창가에 앉아 커피잔을 손에 들고 있던 그녀는 첫마디로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비혼주의자예요.”


그녀의 말은 단순한 자기소개였을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무언가를 건드리는 한 마디였다. 마치 나를 거울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비혼주의자라고 선언했을 때, 나는 내 비혼주의가 무언가 허울 좋은 방패처럼 느껴졌다. 나는 상처를 숨기기 위해 그것을 선택했지만, 그녀의 비혼주의는 오히려 그것을 꺼내 보이며 세상과 마주하는 용기처럼 보였다.


그 후로 그녀와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왜 비혼주의를 선택했는지, 연애에서 무엇을 잃고 얻었는지, 그리고 앞으로는 무엇을 기대하고 싶지 않은지.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과정에서 이상하게도 우리는 닮아 있었다. 그녀도 긴 연애의 끝에 상처를 입었고, 그로 인해 결혼이라는 제도에 더 이상 의지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우리의 솔직함은 처음부터 상대방을 지켜보는 경계 따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결혼하지 않더라도 사랑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녀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믿고 싶어요.” 내가 대답했다.


그 대화는 우리의 관계를 결정지었다. 결혼이라는 무게는 내려놓고, 그 대신 사랑의 가벼움과 애틋함만을 붙잡기로 했다. 우리는 서로를 속이지 않았다. 미래에 대해 약속하지 않았고, 영원을 논하지 않았다. 그 대신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행복에만 집중했다.


그녀와의 연애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너무나 솔직했고, 그래서 애틋했다. 서로가 가면을 쓰지 않았기에, 우리는 더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솔직함이 때로는 서로의 깊은 상처를 들춰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들이었고, 그렇기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첫사랑 이후 다시는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지 못할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믿음을 무너뜨렸다. 그녀와의 관계는 결혼이라는 제도도, 영원이라는 약속도 필요 없었다. 단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고, 함께할 수 있는 시간 동안만 사랑하기로 한 약속이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얼마나 짧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녀와의 사랑은 내게 진정한 자유와 솔직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비혼주의자와의 연애는 그렇게 애틋했고, 그래서 더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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