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나를 마주하다.

by someformoflove

몇 년째 나는 제주 올레길을 걷고 있다. 길은 단순히 한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가는 통로가 아니다. 걷는 내내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스쳐 가고, 때로는 지나온 나를 돌아보게 하고, 때로는 앞으로의 나를 그리게 한다. 걷는다는 것은 발을 옮기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었다.


이번 겨울, 나는 11코스를 걷기로 했다. 아침 일찍 출발지점에 도착하니 단체로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밝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함께 출발할 준비를 하는 그들의 모습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혼자 걷는 걸 좋아한다. 내 생각에 집중할 수 있고, 걸음을 멈추고 싶을 때 멈추며, 사진을 찍고 싶을 때 찍을 수 있다. 그래서 그들과 섞이기 싫어 그들보다 한 발 앞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참을 걸은 뒤, 잠시 숨을 고르려 멈춘 사이 그들이 나를 지나쳐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걸음을 내딛었지만, 마음은 묘하게 조급해졌다. “경쟁도 아닌데 왜 이리 신경이 쓰이는 걸까?”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으며 발걸음을 더 빠르게 옮겼다. 이길 필요도 없고, 어차피 목적지는 같을 텐데 나는 어딘가 초조했다. 마침 그들이 단체로 화장실에 들른 틈을 타 나는 그들을 다시 앞질렀다. 나 혼자만의 길을 걷고 싶었던 내가, 어느새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바쁘게 걸어가던 중 문득 깨달았다. 내가 그렇게 신경 쓰던 그 사람들은 아마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길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왜 그들이 단체로 걷는 방식을 속으로 규정짓고, 나만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있었을까. “혼자 걸어야 진정한 올레길이지.” 그런 생각으로 나만의 길을 고집하면서도, 정작 나는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던 풍경들을 지나쳐 버렸고, 올레길이 주는 겨울의 적막한 아름다움을 놓치고 있었다.


혼자 걷는다는 것은 자유롭다. 내 걸음의 속도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나 자신이다. 하지만 혼자만의 길은 그만큼 단조롭기도 하다. 함께 걷는 길에서는 분명 나와 다른 속도와 방식을 경험하게 된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던 아침과 달리, 한참을 걷다 보니 그 소리가 조금은 궁금해졌다. 함께 걷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혼자 걸으며 길의 끝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려 했지만, 길의 또 다른 의미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데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돌아보는 일이다. 그리고 나를 돌아본다는 것은 결국 나와 다른 사람들, 나와 다른 방식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올레길을 혼자 걷는 방식을 고집해 왔다. 마치 그게 올레길을 제대로 걷는 방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그 길 위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무언가를 규정짓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좁은 틀에 가두게 된다는 사실이다. 혼자 걷는 올레길은 여전히 좋지만, 그 고독 속에서만 볼 수 없는 것들도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 것 같다.


겨울의 길은 고요하다. 차가운 바람과 희미한 빛 속에서 혼자 걷는 길은 여전히 나에게 소중하다. 하지만 언젠가 나는 누군가와 이 길을 걸어보고 싶다. 함께 걸을 때 느낄 수 있는 풍경들, 나 혼자서는 보지 못한 세상을 그 길 위에서 마주하고 싶다.


그리고 이 길이 끝날 때쯤,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넓어진 마음으로 다른 길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이 길은 아직 나만의 길로 남겨두려 한다. 내가 선택한 걸음의 속도로, 내가 보고 싶은 풍경을 바라보며.


그리고 어느 날, 나와 다른 속도로 걷는 사람들과도 함께 웃으며 이 길을 걸을 날을 조용히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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