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공기는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하늘은 투명했다. 이상할 정도로 평화로운 날이었다.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마주 보고 있지만, 서로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나는 시선을 자꾸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녀는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따뜻했다기보다는, 체념과 다짐 사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그 순간, 나는 그녀가 이미 떠나갈 준비를 끝냈다는 걸 알았다.
한동안 서로 침묵이 이어졌다. 테이블 위의 찻잔은 비워져 있었고, 우리는 그 빈 잔처럼 말을 비우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나는 따라 일어서지 못했다. 그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그녀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눈빛을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었다. 이별의 순간에 적당한 말이란 있을 수 없다는 걸, 그날 처음 깨달았다.
“잘 가.”
그녀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였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잘 가.”
그게 끝이었다. 그녀는 뒤돌아섰고,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가볍게 흔들리는 긴 머리카락과 점점 멀어지는 발걸음. 그녀가 길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그녀를 떠올리는 일이 줄어들었다. 처음엔 모든 것이 그녀와 연결되어 있었다. 걷는 길도, 듣는 노래도, 손에 닿는 물건들조차도.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조금씩 그녀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잔잔한 피아노 곡이 흘러나오는 순간엔 그녀가 다시 떠오른다.
나는 종종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나와 함께했던 시간들 속에서 그녀는 얼마나 많이 주저했을까. 내게 맞추려고 애썼던 순간들, 스스로를 억누르며 나를 이해하려 했던 순간들. 그녀는 나와 함께하면서 자신의 날개를 펼치지 못한 채 바닥에 머물러 있었던 건 아닐까.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이 그녀에게는 더 이상 자유가 아니었다. 사랑은 때로 한 사람에게는 날개가 되지만, 다른 한 사람에게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그녀에게 나는 후자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더 멀리 날아가야 했다. 나와 함께라면 닿을 수 없을 곳으로.
지금 그녀가 어디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녀는 이제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더 높이, 더 멀리, 그리고 더 자유롭게 날아가기를 바란다.
그녀를 떠나보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이별은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필요했던 순간이었다. 나는 이제 그녀가 자신을 더 이상 주저하지 않게 되길, 그리고 그녀의 날갯짓이 더 힘차고 자유롭길 바란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고, 나는 눈을 감는다. 그녀가 멀리 날아가면서도, 가끔은 그 하늘 어딘가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어주길 바란다. 그녀의 안녕을 빌며, 나는 고요히 침묵 속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