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이 있어 길을 나섰다. 도시의 어둠을 뚫고 가로등 아래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공사장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밝은 조명을 켜둔 공사 현장에서 그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철골을 옮기고, 장비를 정리하고, 무언가를 조율하며 분주히 몸을 움직이는 모습. 그 장면은 잠깐의 빛처럼 스쳤지만, 내 머릿속엔 꽤 오래 남았다.
“같은 시간에 이렇게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구나.”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각기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한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지만, 서로의 시간을 알지 못한 채 평생을 지나칠 것이다. 나는 그들과 비슷한 새벽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결코 그들의 삶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공사장에서의 새벽은 내게 이방인의 세계처럼 보였다. 나는 그 시간에 살아본 적이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들의 하루와 나의 하루는 나란히 놓여 있지만, 결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처럼 이어져 있다. 그 생각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모두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서로의 세계를 알지 못한 채로 지나간다니.
세상이 발달하기 전,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세계만 알고 살아갔다. 바깥의 다른 시간대를 상상할 필요도, 기회도 없었다. 해가 뜨면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잠드는 일상이 전부였다.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넓어진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여전히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인터넷이나 뉴스, 영상매체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단편을 보여준다. 뉴욕의 복잡한 거리를 걷는 사람, 아프리카의 고요한 초원 위에서 동물을 돌보는 사람, 일본의 좁은 골목에서 라면을 만드는 사람. 이 모두가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삶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한 번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일 뿐, 그들의 삶을 실제로 경험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단편을 보며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우리는 같은 2025년을 살아가는구나”라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순간 전 세계에서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그들의 세계를 결코 알지 못하고, 그들은 나의 세계를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헤어진 연인을 떠올리게 된다.
그녀와의 관계가 끝난 뒤, 그녀는 더 이상 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의 시간은 이제 완전히 분리되었다. 서로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헤어지고 난 뒤, 그녀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어떤 길을 걷고, 무엇을 먹고, 누구를 만났을까?
나는 더 이상 그것을 알 수 없었다. 그것이 이별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그 단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 해도, 서로의 삶은 영원히 다른 세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그녀의 소식을 알 수 없는 내가, 새벽의 공사장을 보며 동시대의 동질감을 떠올렸다는 사실이 묘하게 웃겼다. 내가 한때 가장 가까웠던 사람의 세상조차 완전히 알 수 없으면서, 스쳐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가늠하려 하다니.
공사장 사람들은 여전히 그곳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나를 지나가는 차창 너머에서 스쳐 지나갔던 사람 정도로 기억하지 않을까. 아니, 기억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세상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들도 나를 모른다. 우리는 단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 알 수 없는 세계들이 모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결코 경험하지 못할 수많은 시간대와 삶들이 서로 얽혀 지금의 세상을 이루고 있다.
그 생각을 하면 조금은 위안이 된다. 모든 것을 알 수 없어도,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살아가도,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오늘 새벽에 공사장을 지나며 했던 짧은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할 사람들.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함께 2025년을 살아가고 있다. 서로의 세상을 모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