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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굳은살

by someformoflove

사람은 누구나 감정의 굳은살을 가지고 산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상처 속에서, 마음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조금씩 단단해진다. 슬픔도, 분노도, 외로움도 어느 순간 무뎌진다. 굳은살이 생긴 감정은 더 이상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그 무딤 속에서 나는 어쩌면 더 단단해졌고, 또 한편으로는 더 공허해졌다.


나는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그 감정을 드러낸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 거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사람들은 슬픔을 나누면 줄어든다고 말하지만, 내게는 오히려 슬픔이 더 커진 적이 많았다. 누군가에게 내 아픔을 이야기하면 돌아오는 것은 위로보다 더 큰 무력감이었다. “힘내라”는 말은 결국 내 상황을 바꿔주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감정을 나누기보다는 혼자서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기쁨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슬픔은 더 깊이 매몰되었다. 감정이란 것이 결국 나 혼자만의 문제라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 그런데도 가끔은 한꺼번에 쏟아내는 순간이 있다.


몇 달 전, 회사를 퇴근하던 길이었다. 하루 종일 쌓였던 스트레스와 밀려오는 피로감에, 그날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기력했다. 집으로 가는 길, 자동차 안에서 갑작스레 눈물이 쏟아졌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나는 한참을 울었다. 처음에는 내 울음소리가 낯설었다. 마치 오래 닫아둔 문이 갑자기 열리며 울음과 함께 묵혀둔 감정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벅차올랐다.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하고, 스스로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감정을 쏟아낸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울고 난 뒤의 나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공허해졌다. 문제는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고, 내 울음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쏟아낸 것은 단순한 눈물이 아니라, 이미 썩어버린 감정의 일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 감정을 꺼내놓는다고 해서, 내 안의 상처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의 신체에는 굳은살이 있다. 신체적으로 많이 쓰는 부분에는 그만큼 강한 압력이 반복되면서 굳은살이 생긴다. 처음에는 아프고 쓰라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굳은살은 무뎌지고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된다. 마음의 굳은살도 그와 같지 않을까. 계속되는 감정의 충격 속에서 내 마음은 점점 단단해졌고, 그 단단함 덕분에 이제는 더 이상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물론, 굳은살을 도려내면 새살이 돋아난다. 마치 울고 난 뒤의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처럼. 하지만 문제는 새살이 돋아나도 여전히 똑같은 자극이 반복된다면, 그 자리에 다시 굳은살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굳은살을 도려내는 대신, 그 굳은살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무뎌진 감각은 예전처럼 예민하지 않지만, 그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굳은살이 생겼다는 건 내 마음이 그만큼 강해졌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보호막 같은 것이다.


울었던 그날 이후, 나는 차 안에서 흘렸던 눈물을 자주 떠올린다. 그리고 그 눈물도, 그 공허함도 내 삶의 일부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굳은살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삶이 내게 준 상처들이 남긴 흔적일 뿐이다.


그 굳은살이 있다면, 아마 나는 더 단단히 서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끔은 새살이 돋아나는 상쾌함을 느끼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 굳은살조차 내가 버리고 싶지 않은 나의 일부다.


무뎌졌다고 해서 사랑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단단해졌다고 해서 느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오늘도 내 감정의 굳은살과 함께 살아간다. 그것은 내가 여전히 삶 속에서 무언가를 견디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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