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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부재, 그리고 슈뢰딩거의 고양이

by someformoflove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구에는 인간이 인식하고 표현하는 다양한 영역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빛과 에너지는 나에게 유독 신비롭게 다가온다. 이 두 개념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다. 빛은 단순한 광선이 아니라 존재의 증명이고, 에너지는 움직임과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본질적 힘이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모두 존재와 부재의 관점에서 정의된다.


어둠이란 무엇인가? 어둠은 ‘존재’하는가, 아니면 단순히 빛의 부재인가? 마찬가지로, ‘차가움’이라는 감각은 냉기의 존재로 인한 것이 아니라, 단지 열 에너지의 부재로 인해 발생한다. 무한히 낮아지는 에너지는 없다. 절대영도(-273.15°C)라는 개념조차 ‘완전한 정지’를 가정할 뿐, 물리적 현실에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경계다. 마찬가지로, 어둠도 끝없이 깊어질 수 없다. 이미 빛이 전혀 없는 상태라면 더 이상 어둡다고 표현할 근거조차 사라진다.


이렇듯 세상의 이치는 ‘존재’와 ‘부재’라는 두 가지 상태로 나뉜다.

빛이 있으면 우리가 무언가를 볼 수 있고, 에너지가 있으면 무언가가 움직인다. 결국, 우리는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부재는 곧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단순한 이치는 우리의 일상부터 우주의 근본까지 적용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떠올려본다.

슈뢰딩거가 제시한 이 사고 실험은 양자역학의 기묘한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존재와 부재’의 철학적 질문으로 받아들인다. 실험의 기본 설정은 간단하다. 상자 안에 독극물이 든 장치와 고양이가 함께 들어 있다. 독극물은 방사성 원자의 붕괴 여부에 따라 방출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관찰자가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 고양이는 살아 있음과 죽어 있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 즉 ‘중첩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 지점에서 의문이 시작된다.

상자 속 고양이는 정말 존재하는가?

만약 내가 직접 관찰하지 않는다면, 그 고양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움직임 센서를 설치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 센서조차 인간이 만든, 살아있음이라는 개념을 정의하는 또 다른 도구일 뿐이다. 이 역시 ‘존재의 증명’이라기보다는 ‘존재의 추정’에 가깝다.


나는 이 지점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존재와 소멸의 중간 단계로 본다.

관찰하기 전까지는 그 상태를 확정할 수 없기에, 존재와 부재가 동시에 가능하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양자역학의 패러독스가 아니다. 사실 우리 삶 곳곳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다.


생각해 보자.

슈뢰딩거가 그의 연구를 발표하던 시기,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조선의용군이 창설되고 있었다. 슈뢰딩거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슈뢰딩거의 인식 속에서는 조선의용군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을까? 부재란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한 인식의 결핍일까?


여기서 중요한 결론에 도달한다.

존재는 인식과 무관하게 존재한다.

내가 모른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내가 본다고 해서 새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조선의용군은 슈뢰딩거의 인식 여부와 관계없이 존재했고, 상자 속 고양이 역시 관찰과 관계없이 살아있거나 죽어 있을 뿐이다. 우리가 흔히 믿는 ‘관찰이 존재를 규정한다’는 개념은, 어쩌면 인간의 오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나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재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 느끼지 못한 것, 인식하지 못한 것은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개체의 한계이자 특징이다. 우리는 세계의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고, 결국 각자의 좁은 시야 속에서 세상을 정의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은 존재와 부재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나는 누군가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고, 반대로 어떤 이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존재로 남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관찰과 인식, 그리고 기억의 문제다. 존재와 부재는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경험일지도 모른다.


결국, 세상의 모든 이치는 존재와 부재로 나눠진다고 생각한다.

존재는 빛과 같아서 스스로를 드러내지만, 부재는 어둠과 같아서 인식될 수 없다. 그러나 어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 것처럼, 부재 또한 어쩌면 다른 형태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나의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재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삶이고, 개인의 세계관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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