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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빅데이터

by someformoflove

“짝사랑은 나이 들수록 안 하게 돼.”


커피숍 창가 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무심히 이런 말을 뱉었다. 마주 앉은 후배는 내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요?”


창밖으로 시선이 흘렀다. 한 남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후배의 눈길이 그를 조심스럽게 따라가는 것을 눈치챘다. 마치 그 남자의 걸음 하나하나에 작은 의미를 부여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순간, 나도 오래전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커피잔을 살짝 돌리며 웃었다.

“영화 결말 보면 재미있어, 재미없어?”


후배는 조금 더 궁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죠?”


“영화가 처음 시작할 땐 모든 게 새롭잖아. 인물도, 배경도, 사건도. 그래서 빠져들고 궁금해하지. 하지만 결말을 알고 나면, 다시 볼 때 그 긴장감이 사라져. 예상할 수 있으니까.”


후배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나는 이어서 말을 덧붙였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비슷해. 어릴 땐 그 사람 자체가 새로운 영화야. 작은 행동 하나, 말투, 웃음까지도 신기하고 특별하지. 하지만 나이가 들면 달라져. 누군가를 좋아하기 전에 머릿속에서 ‘빅데이터’가 자동으로 작동해.”


“빅데이터요?”


“응. 살아오면서 쌓인 모든 경험, 기억, 상처들이 데이터가 되는 거야.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아마 이렇게 행동할 거야. 저런 성격이면 분명 이런 문제를 겪게 될 거야.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이 돌아가. 그러다 보면 애초에 시작을 망설이게 돼.”


후배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조용히 말했다.

“근데 그런 거 다 알면서도 좋아하는 감정은 막기 어렵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감정은 이성보다 빠르거든. 그런데 나이 들수록 그 감정이 시작도 하기 전에 이성이 브레이크를 걸어. 어릴 땐 그 사람만 바라보면서 사랑하지만, 나이 들면 결국 나 자신을 더 많이 돌아보게 돼.”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온기가 입안에 퍼졌지만, 그보다 더 익숙한 건 마음 한 켠에 남아 있는 오래된 감정의 찌꺼기였다.

“내가 준비되지 않아서 놓친 순간들이 많았거든. 정말 사랑했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때는 몰랐어.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결국 중요한 건 나 자신이더라고.”


후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남자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음에도 후배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이 나쁜 건 아니야. 하지만 나이가 들면, 사랑이란 건 누군가를 향한 감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를 얼마나 지킬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해. 그래서 망설이게 되는 거지.”


후배는 가만히 생각에 잠긴 듯했다.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한 번쯤은 달려들어보고 싶어요. 결과가 어떻든.”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게 맞아. 아직은 그렇게 살아도 돼. 아니, 오히려 그렇게 살아야 해. 그래야 네 빅데이터도 쌓이는 거야.”


후배의 웃음 속에는 여전히 풋풋한 설렘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웃었던 적이 있었지.


사람은 결국 실패와 후회로 배우는 법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경험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든다. 짝사랑이든, 사랑이든, 혹은 실패든. 중요한 건 그 모든 감정들이 내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이다.


후배의 커피잔에 남은 마지막 한 모금처럼, 나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는 감정들이 있었다. 잊은 줄 알았던 감정들, 미련한 선택들, 그리고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한 질문들.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후회하지 말고, 지금 네 감정에 솔직해져. 시간이 지나면, 사랑이든 아니든 결국 남는 건 그 순간을 얼마나 진심으로 살았느냐야.”


커피숍을 나서며 창밖의 빛이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어쩌면 사랑도 그런 게 아닐까. 꼭 잡으려 하면 사라지고, 무심한 순간에 다시 떠오르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자라나는 것 같다.

짝사랑이든, 사랑이든, 결국 중요한 건 나 자신을 더 잘 알아가는 과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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