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지워지지 않는 향

by someformoflove

생각을 꺼둔 채 잠들었다.

요즘은 일부러라도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으려 한다. 하루를 바쁘게 채우고, 피곤함을 쌓아 두면 자연스레 잠이 들겠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날일수록 꿈속에서는 네가 나타난다.


꿈에서 너를 만났다.

오래전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함께 있었다. 네가 웃었고, 나는 그 웃음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꿈속에서조차 그 순간이 불안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사라질 걸 미리 아는 사람처럼.


눈을 뜨고 나니 새벽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안 하려 하면 할수록 더 생각나는 게 그리움이라던데.”


기억이란 참 모순적이다.

애써 밀어내려 하면 더욱더 선명해지고, 잊으려 하면 더욱더 깊이 새겨진다. 사람들은 흔히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흐려진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절반만 맞다.

시간이 지나면서 흐려지는 것은 세부적인 장면들뿐이다.

하지만 감정의 결은 오히려 더 뚜렷해진다.


어떤 향기가 그렇다.

처음 맡을 땐 강렬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문득 다시 마주하게 되면 그때의 기억까지 함께 떠오르는 것처럼.


얼마 전, 우연히 예전에 함께 갔던 카페에 들르게 된 적이 있다.

그곳을 찾아간 건 아니었다. 그냥 가까운 곳에서 약속이 있었고, 끝나고 가볍게 커피나 한 잔 하려고 들어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문을 여는 순간, 잊고 있던 기억이 밀려왔다.

익숙한 인테리어, 나무 테이블,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 향까지.

그곳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오히려 내가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너와 함께 이곳에 앉아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네가 마셨던 커피, 대화 중간에 문득 창밖을 바라보던 네 표정,

작은 디저트를 포크로 조심스럽게 나누던 손짓까지.


그때는 그게 마지막일 줄 몰랐다.

우리의 대화가 평범한 일상에서 이별로 흘러가고 있었음을,

그 순간에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마지막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나는 더 오래 그 순간을 붙잡았을까?

아니면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척 더 가볍게 넘겼을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단단해진다.


어릴 적의 감정들은 날것 그대로였다.

갓 오크통에 담긴 술처럼, 아직 숙성되지 않은 상태로 거칠게 부딪쳤다.

기쁨도, 슬픔도, 그리움도 전부 가감 없이 드러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시간이 지나면서 감정은 깊어졌고, 대신 많은 것들이 증발해 버렸다.

처음에는 너무 강렬했던 것들도, 점점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레 희미해졌다.


사람도 그렇다.

처음엔 없으면 안 될 것 같던 사람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감정이 가라앉는다.

그러다 문득, 한참 동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게 성장인지, 무뎌짐인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다.


하지만 어떤 향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바람이 스쳐 갈 때 문득 그 향이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너도 내게 그런 존재다.

너라는 감정은 휘발되지 않았다.

그저 깊숙이 스며들어, 일상 속 어딘가에서 문득 나를 멈추게 할 뿐이다.


그게 아프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아프다기보다는, 그냥 그런 것이다.


마치 시간이 지나 깊어진 술이 처음과 다른 맛을 내듯이,

내 안에 남아 있는 너의 향도 이제는 그때와는 조금 다르다.


예전처럼 타오르지는 않지만,

여전히 나를 멈춰 세우는 힘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걸 억지로 지우려 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그렇게 남아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 안의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