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 없는 관계는 흔들리는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과 같다. 처음엔 그 흔들림이 설렘이 되고, 마치 어디로 흘러가든 즐겁기만 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라는 사람의 무게가 점점 더 실려갈수록, 배는 더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방향을 알 수 없는 배에서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랑에도 확신이 필요하다는 걸 아주 오래 걸려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그 확신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함께 있을 때 이유 없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굳이 하지 않게 되는 것,
지치지 않고 꾸준히 마음이 머무는 것.
그런 단순한 몇 가지 지점에서 시작된다.
언젠가 주우재가 한 유튜브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20대 땐 10개 중 하나 맞으면 고였거든요? 근데 30대 중반쯤 되니까 하나 아니면 뒷걸음질 치게 되더라고요.”
그 말에 웃으면서도 마음 한쪽이 찌릿했던 기억이 난다.
맞는 말이니까.
예전의 나는, 어쩌면 단 하나의 감정에 기대어 나머지를 전부 덮으려 했던 사람이었다.
잘 맞지 않아도, 어떻게든 맞춰보려 애썼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자고 말하면서도, 실은 나를 깎아내 상대의 빈 곳을 채워주는 데 익숙했던 것이다.
그렇게 사랑이란 이름 아래, 나라는 사람의 모서리들이 사라져 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날이 있었다.
지친 퇴근길, 애써 약속 장소로 향하던 길목에서, 나는 그날따라 걷는 게 너무 버겁다고 느꼈다.
대화 하나를 위해 마음을 다듬고, 어울리는 말과 표정을 고민해야 하는 관계는,
결국 그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관계에 내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게 처음이 아니었다.
매번 사랑이라 믿고 시작한 관계에서, 나는 점점 나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맞지 않으면, 애초에 가까워질 수 없는 사람도 있다는 걸.
노력으로 되는 건 사랑이 아니라, 관성에 가깝다는 걸.
그제야 나는 나를 덜 깎기 시작했고, 깎지 않은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부터 내 곁엔 사람들이 남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더하지 않아도,
말끝을 부드럽게 다듬지 않아도,
한 걸음 물러서지 않아도 함께 있어주는 사람들.
조용히 옆에 앉아 같은 온도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 사람들.
그제야 확신이 무엇인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사랑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감정이기도 하지만,
가끔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가만히 안아주는 힘이기도 하다는 걸.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있다는 걸.
지금 생각해 보면, 과거의 나는 끊임없이 ‘맞추는 사람’이었다.
낯선 퍼즐 조각을 들고 내 몸에 새겨진 그림을 지우며 조립하려 했고,
그렇게 완성된 퍼즐은 나 같지 않은 무언가가 되어버리곤 했다.
이제는 그런 그림을 더 만들고 싶지 않다.
나와 잘 맞는 사람은 신기하게도
굳이 퍼즐을 깎지 않아도 딱 들어맞는 조각처럼 다가온다.
그들과의 관계는 다르다.
서로를 덜 해석하고, 덜 이해하려고 애써도 어색하지 않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어울려진 사람과는,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 마음이 편안하다.
지금은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며
이 사람이 괜찮아할까 고민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더 이상 애쓰지 않고, 덜 긴장하게 된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나에게 솔직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관계에서야말로,
사랑이라는 감정은 서서히, 오래도록 피어난다.
이제는 확신이 없다면 멈춰 설 줄 안다.
오히려 확신이 있다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조용히 곁에 머물 수 있게 된다.
그런 사랑을,
이제야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