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상처를 치료받길 원하는 이들이 많다. 병든 몸이든, 지친 마음이든, 혹은 삶이 남긴 균열이든, 우리는 그것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이는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하지만 요즘은 치유를 바라는 마음보다, 치유가 ‘마땅히 주어져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태도가 더 두드러진다. 마치 사회와 세상이 본래부터 개인을 위로하고, 보호하며, 안전을 보장해야 하는 절대적 의무를 지닌 것처럼 말이다.
노력한 자의 시간을, 같은 인간이라는 명목 아래 아무렇지 않게 취한다면 누가 다시 노력하겠는가. 수년간의 훈련, 실패와 재도전을 통해 쌓아 올린 결과물을 단지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나누는 순간, 노력의 가치는 어떻게 평가받을까. 더구나 그 성취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는 순간, 그는 오히려 ‘공동체의 연대’라는 규범에 어긋난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이런 규정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진정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모두를 동일한 수준으로 묶어 무기력하게 만들기 위함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세상은 애초에 모두를 위해 작동한 적이 없다. 자연의 법칙은 단순했다. 더 빠른 발톱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종이 살아남았다. 강한 바람은 약한 가지를 꺾었고, 깊이 뿌리내린 나무만이 폭우를 견뎠다. 인간이 이 법칙을 거슬러 서서히 지구를 지배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수십만 년에 걸친 생존 경쟁 속에서, 우리는 불을 만들고, 도구와 무기를 제작하고, 부족과 국가를 세우며, 끝없는 추위와 굶주림, 전염병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았다.
문명은 우리를 따뜻한 방 안에 앉혔다. 이제는 창과 활 대신 법과 제도가, 불씨 대신 전원 버튼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하지만 풍요 속에서 길러진 손은 싸움보다 수령(受領)에 익숙해졌다. 노력의 과정보다 결과를 취하는 법을 먼저 배우게 된 것이다. 장시간 노동 없이도 생필품을 얻고, 국가가 보장하는 안전망을 당연하게 누리며, 위험을 스스로 감수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에 익숙해졌다.
나는 이 흐름이 마냥 편안하지 않다. 대가 없는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 최소한의 안전과 복지를 ‘기본값’처럼 여기는 태도. 물론 권리와 복지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의 근로시간 단축, 의료보험 제도, 여성 참정권, 각종 사회 안전망—이 모든 것은 누군가의 희생과 투쟁, 그리고 때로는 목숨까지 바친 대가로 세워진 것이다. 우리는 그 영수증을 보지 않는다. 단지 진열대 위의 물건처럼, 거기에 ‘있어야 할 것’으로만 인식한다.
가끔은 다른 상상을 해본다. 만약 언젠가 인공지능과 기계가 인간의 의사결정권을 넘어 생존권까지 통제하게 된다면, 우리는 여전히 같은 요구를 할 수 있을까. 그 앞에서 “인간다운 대우”를, “최소한의 권리”를 외칠 수 있을까. 아니면 효율을 기준으로 ‘불필요한 존재’로 분류되는 순간, 그 권리는 얼마나 허망하게 사라질까.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복지와 권리의 기반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상상해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죽음이나 절대적 위기 앞에서도 인간은 존엄을 요구할 수 있을까. 아니면 존엄은 힘 있는 자, 자원을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선택지가 될까. 이 질문은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이미 일부 지역과 사회에서는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전쟁이나 내전, 경제 붕괴를 겪은 나라에서, 권리와 복지는 하루아침에 사라진다. 그리고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다는 생각조차 사치로 여긴다.
세상은 누구에게도 무조건적인 편이 아니다. 역사는 이를 반복해서 증명해 왔다. 권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 그 과정을 잊는 순간, 지금 누리는 것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안락함을 의심한다. 이것이 결코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내가 누리는 안전과 평화는, 누군가의 지난 투쟁과 희생 위에 세워져 있다. 그 희생을 기억하고, 가능하다면 내가 속한 자리에서 최소한의 기여라도 하려 한다.
치유와 보호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을 공기처럼 당연시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이 사라졌을 때 숨조차 쉴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약함이 아름다울 수 있지만, 세상은 그 아름다움을 오래 보존해주지 않는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원리를 버린 적이 없다. 다만 그 싸움의 도구가 변했을 뿐이다. 총칼 대신 제도와 규범, 담론과 투표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나 본질은 같다. 지키려는 자만이 지켜낸다.
아마도 이 글은 결론보다 질문을 남길 것이다. 기계가, 혹은 다른 힘이 세상을 지배하는 미래에도 우리는 지금처럼 권리를 요구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때가 되어서야 깨닫게 될까.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너무 쉽게 당연하게 여겨왔는지를.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다만 그 미래가 오기 전에, 최소한 우리가 지금 누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해졌는지부터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진짜 ‘치유’의 시작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