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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임의 기원

by someformoflove

사랑은 지금 진행형이다.

우리는 함께 있고, 너는 여전히 내 옆에서 웃고, 나 역시 그 웃음에 젖어든다.

그런데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순수했던 시절에 너를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이건 후회가 아니다. 그렇다고 바람도 아니다.

그냥, 문득의 감정.

어떤 오래된 습관처럼 스며든 상상 하나.

잔잔한 호수 위로 던져진 돌멩이처럼, 중심은 변하지 않았지만 파문이 생긴 것이다.


나는 본래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다기보다는, 살아오며 그렇게 됐다.

어릴 적의 나는 충돌을 피하지 못했고, 마땅한 대피소 없이 온몸으로 받아내며 자랐다.

사람들은 그것을 ‘강인함’이라 불렀지만, 정작 나는 그 단단함이 아니라 ‘피할 수 없었던 무방비’에서 비롯된 것임을 안다.

어디로 숨는 법을 몰랐기에, 결국 견디는 법만 배웠다.


그리고 그 견딤은 어느 순간 기준이 되었다.

사람을 만나면, 감정보다 먼저 손익을 따지게 되었고

마음이 움직여도, 그 감정이 가져올 가능성의 스펙트럼을 먼저 떠올리게 됐다.

좋은 일보다는 아플 일부터 떠오르는 건, 경험이 주는 유산일까, 상처가 만든 반사신경일까.

그래서 나는 이제, 내 마음을 감각보다 늦게 꺼내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나에게 너는, 어딘가 모르게 ‘맑음’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스며드는 빛처럼 조용히 다가왔고, 손에 닿는 순간에도 경계심을 유발하지 않는 사람.

네가 무방비로 웃을 때마다 나는 깨닫는다.

아, 나는 이렇게 웃지 못하는 사람이었구나.

너는 어쩌면 다쳐본 적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

아니, 적어도 도망칠 수 있게 해주는 어른이 있었던 사람.

너는 울 때 방으로 들어가 숨을 수 있었고, 나는 울어도 도망갈 곳이 없어 그 자리에 서서 말라야 했던 사람.


우리는 서로 닮았다.

적어도 겉모습은,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템포로 걷고, 같은 음악을 들으며 같은 방식으로 웃는다는 의미에서.

하지만 마음의 결은 조금 다르다.

너는 사랑 앞에서 망설이지 않는다.

나는 사랑 앞에서 잠시, 아주 잠시, 숨을 고른다.

그 차이는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지만, 내 안에서는 커다란 파동이 된다.

너는 내가 감추려 했던 나의 ‘복잡함’을 자꾸 들여다본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괜찮아, 그런 너도 너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쩌면 내가 가장 원했던 구원이 이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를 묻지 않는 사람,

망설임조차 이해하는 사람.

그리고 그 망설임마저도 너에게 조심스럽게 건넬 수 있다는 것.

그건 사랑의 한 방식이고, 나에겐 그것이 조금 늦게 도착한 감정일 뿐이다.


그러니 오늘 내가 했던 그 생각,

“조금 더 순수했던 시절에 너를 만났다면 어땠을까”는

사실 그만큼 너를 맑다고 느낀다는 말이고,

그만큼 나도 언젠가는 맑았다는 기억이고,

무엇보다, 지금의 내가 그 맑음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다.


너는 나를 자꾸 지금으로 데려온다.

과거를 닮은 상념 속에서도,

결국 나는 네 옆으로 돌아온다.

그게 사랑이라는 걸,

나는 이제 천천히,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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