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나는 너를 몰랐다.
정확히는, 너를 안다고 착각했다. 너의 크기가 너무 커서 몇 번이나 등을 돌렸고,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피했다”고 말했다. 도망친 쪽이 내 쪽인데도, 이상하게 너 곁에 있던 시간이 더 환했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처럼, 특별할 것 없는 순간들이 자꾸만 빛났다. 무너진 것도 나였는데, 네 탓으로 돌리면 마음이 덜 무거웠다.
행복이 무엇인지 몰랐다.
아니, 불행해야만 산다고 믿었다. “불행을 알아야 행복을 알아본다”는 문장을 부적처럼 품고 다녔다. 그래서 일부러 어둠 쪽으로 걸었다. 비 오는 날을 더 좋아했고, 슬픈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고, 우울한 영화를 찾아봤다. 먼저 바닥을 확인해두면, 언젠가 그 반대편이 손에 잡히지 않을까. 마치 깊은 곳까지 잠수해야 수면 위의 공기가 더 달콤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너는 그 틈으로 소리 없이 들어왔다.
어느 봄날 오후였다. 설명도, 증명도 없이. 바람처럼. 커피 잔을 들고 있던 손이 따뜻했고, 네가 한 말이 귓가에 맴돌았고, 그냥 그 순간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몸이 먼저 알아차렸다. 가슴 어딘가가 부드럽게 풀어지는 느낌. 오랫동안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펴는 것 같은.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맛을, 우연히 유명한 집에서 처음 맛봤을 때처럼.
이름을 붙일 수 없는데 혀끝이 먼저 떨린다. 낯선데 익숙하고, 두려운데 따뜻하고, 몸 어딘가가 천천히 녹아내리는 느낌. 처음으로 “아, 이게 행복일 수도 있겠다”를 배웠다. 아니, 배웠다기보다는… 그냥 덮쳤다. 생각이 따라갈 틈이 없었다. 머리는 아직 의심하고 있는데, 입꼬리가 먼저 올라갔다. 그런 순간들이 쌓였다. 별것 아닌 문자 하나에 하루가 가벼워지고, 네 목소리 한마디에 밤이 덜 무거워졌다.
오래가지 못했다.
너 때문이 아니었다. 내 습관이 그랬다. 손에 쥐어진 순간, 다시 어둠 쪽으로 몸을 숨겼다. 이게 내 것이 맞는지, 내가 감당할 크기가 맞는지, 진짜인지 환상인지. 확인하려고 계속 만지작거렸다. 밤마다 네 말의 의미를 뒤집어보고, 표정의 결을 곱씹고, 침묵의 온도를 재봤다. 의심이 쌓일수록 행복은 멀어졌다. 손때가 묻고, 숨이 막히고, 빛이 조금씩 바래갔다. 붙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먼저 밀어내고 있었다. 행복을 너무 세게 쥐어서, 그 안에서 숨이 차올랐다.
최고의 행복을 느끼고, 잃어버리고서야 불행을 제대로 알았다.
불행을 먼저 통과해야 행복을 알 수 있다고 믿었는데, 정작 행복이 왔을 때는 불행 쪽으로 도망쳤다. 손에 쥐고도 “이게 맞나”를 의심하느라 그 온도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버리고 나서야, 그게 행복이었다는 걸 뼈 깊이 알게 됐다. 너 없이 맞이한 첫 겨울은 유독 추웠다. 똑같은 거리를, 똑같은 시간에 걸었는데, 공기가 달랐다. 아이러니하다. 행복을 알려고 불행을 찾았는데, 결국 불행 속에서야 행복을 선명하게 읽어냈다. 빛을 잃고 나서야 빛의 모양을 정확히 그릴 수 있게 된 것처럼. 내 인식은 언제나 한 계절 늦게 도착한다.
미련하다. 늘 그랬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스스로가 모순 덩어리다. 마음이 말이 되기 전에 벌써 반대편으로 몸을 기울이고, 나중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 손으로 더듬는다. 그래서 입 밖으로 꺼내는 게 무섭다. 말하는 순간, 내 진심은 또 다른 진심과 부딪혀 산산이 깨질 테니까. 어떤 마음을 고백하면서 동시에, 그 마음을 부정할 준비까지 해버리는 사람이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미 이별을 예상하고,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불행을 경계하는.
어차피 내 진심은 전부 모순이 될 테니.
침묵을 택한다. 말하면 선명해질 것 같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더 흐려진다. 행복은 늘 그랬다. 가까이 있을 때는 의심했고, 멀어지고 나서야 확신했다. 확신은 언제나 뒤늦게 왔고, 그때의 나는 늘 저 멀리, 늦은 시간 속에 서 있었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모른다. 행복이 다시 온다면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지, 이번에는 붙잡을 수 있을지.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안다. 너를 통해 배웠다. 행복은 증명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라는 걸. 의심하는 순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걸. 그 사실 하나만은, 이상하게도 흐릿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