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감하기 위해 침묵한다.

by someformoflove

감정을 모르는 건지, 잊은 건지, 지운 건지 구분이 잘 안 된다. 다만 어떤 표정이 어떤 공기의 방향을 바꾸는지, 말끝이 어디서 떨리는지, 그 미세한 변화는 유난히 먼저 들어왔다. 예민한 촉수만 남고, 받아들이는 기관은 비어 있는 것처럼.


어릴 때부터 비슷했다. 누군가가 슬퍼하면 슬픔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런데 그 슬픔을 ‘슬픔’으로 받아주는 법은 몰랐다. 같이 울어야 할 것 같아서 울면, 그 눈물이 누구의 것이 되는지 혼란스러웠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눈물이 먼저 나오면, 그게 위로인지 연기인지, 모순인지도 헷갈렸다. 그래서 곁에 있는 쪽을 택했다. 말이 아니라 존재로 버티면 된다고 믿었다. 적어도 떠나지만 않으면, 그게 힘이 될 거라고.


공감이라는 말은 늘 좋은 단어처럼 쓰이지만, 믿음이 쉽게 가지 않았다. 비슷한 경험도 없고, 그 사람의 몸으로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알 것 같다”고 말하는 방식이 이해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순간부터, 위로는 얇은 종이처럼 찢어졌다. 잘 접힌 문장만 남고, 실제의 무게는 사라졌다.


그래도 사회는 공감과 고립 사이에서만 문을 열어줬다. 이해하지 못해도 이해한 척,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도 움직인 척.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세 바깥으로 밀려났다. 예민하게 알아채는 능력은 오히려 함정이 됐다. 느끼는 만큼 반응해야 하는데, 어떤 반응이 ‘맞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모른 척하는 기술만 늘었다. 알아채지만 모른다고 말하는 얼굴, 그게 오래 남았다.


그러다 어느 시기부터, 이해를 만들기 위해 고통을 찾기 시작했다. 공감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비슷한 상처를 몸에 갖추려 했다. 상처를 흉내 낸 게 아니라, 실제로 마음을 불에 가져다 댔다. 아파 보면 알겠지, 라는 단순한 결론으로. 그래서 굳이 느끼지 않아도 될 통증까지 끌어안고, 그제서야 “정말 아프네요” 같은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말은 자연스러워졌고, 표정은 적절해졌다. 대신 안쪽은 만신창이가 됐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상하다. “내가 네가 아닌데”라는 문장이 계속 남는다. 타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한데, 가장 잘 알기 위해 애쓰는 모양이 우습다. 이 우스움이 때로는 스스로를 지탱한다. 결국 누구도 마음을 완전히 알지 못하고, 각자 이겨내는 쪽이 인간에 더 가깝다는 생각도 든다. 말로 나눠도 남는 부분이 있고, 그 부분은 각자의 방에 남겨진다.


그럼에도 특정한 얼굴들이 떠오르면 눈물이 난다. 오래 붙어 지낸 사람들일수록 더 그렇다. 오래 봐온 시간, 반복된 선택, 서로의 계절을 몇 번이나 같이 건넌 기록. 그런 것들이 쌓이면 ‘대충 아는’ 감정이 아니라 ‘몸에 남은 감각’이 된다. 적어도 긴 시간의 밀접함이 있어야, 말보다 먼저 알아차리는 것이 생긴다.


그래서 정의가 뒤늦게 굳는다. 한 사람과 계절을 여러 번 함께 살았던 자들만, 그 마음의 결을 조금은 읽을 수 있다고. 나머지는 수박 겉을 쓸어보는 손끝일 뿐이다. 그 손길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지만, 자꾸 그걸 깊이라고 부르지는 말았으면 한다.


요즘 마음은 단순하다. 얇은 공감이 넘실대는 곳에서 멀어지고 싶다. 적당한 말들, 그럴듯한 위로들, 서로를 이해하는 척하는 표정들. 그 사이에 오래 서 있으면, 다시 또 자신을 불에 가져다 대고 싶어질까 봐.


그래서 자주 문 앞에 서게 된다. 나가고 싶은 마음과, 남겨둘 수 없는 얼굴들 사이에서. 어디까지가 고립이고 어디부터가 숨 고르기인지도 모른 채, 문손잡이를 오래 잡고만 있다. 열면 바람이 들어오고, 닫으면 적막이 남는다. 어느 쪽도 완전한 답은 아닌 것처럼 보이고, 오늘도 그 사이에서만 조용히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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