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머릿속이 자주 흐트러집니다. 생각이 많아진다기보다, 기준이 가벼워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분명 붙잡고 살던 것들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유를 붙이면 그럴듯해지겠지만, 실은 그럴듯함이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더군요. 그냥, 혼란은 혼란대로 남습니다.
꾸준함으로 인정받는 걸 좋아했습니다. 남들이 뭐라 하든 크게 상관없었습니다. 비주류든, 느리든, 내 노력이 쌓이는 걸 내가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타인의 시선은 한참 뒤에 두었습니다. 결과가 늦게 와도 괜찮았습니다. 늦게라도 오면, 그건 결국 ‘내가 한 것’으로 남는다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은 꽤 오래 버텼습니다. 더 오래 하려고, 더 많이 깎으려고, 젊음을 덜어냈습니다. 밤을 쌓고, 감각을 쌓고, 손끝에 굳은살을 남기며 기술을 익혔습니다. 그 시절의 몸은 오로지 반복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어찌 보면 미련했습니다. 어찌 보면 그 미련함이 나를 살렸습니다. 문제는, 그 미련함이 한동안은 자랑이었는데, 지금은 질문이 되어 돌아온다는 점입니다.
당시에도 다른 방식이 있었습니다. 누가 더 잘하느냐보다, 누구와 했을 때 더 즐거웠느냐를 기준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관계를 잘 만들고, 분위기를 읽고, 순간을 팔 줄 아는 사람들. 그들은 일을 많이 하기도 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돈은 벌어도 존중은 남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더욱 확신했습니다. 오래 남는 건 결국 실력이라고, 말없이 증명되는 건 결국 시간이라고.
그런데 지금은, 그 기준이 너무 가벼워졌습니다. 꾸준함은 나를 갈고닦는 일이 아니라, 지루해 보이지 않기 위한 반복처럼 취급됩니다. 누가 더 사람을 끄는지, 누가 더 관심을 받는지, 누가 더 잘 떠오르는지. 작업의 밀도보다 노출의 빈도가 먼저 물어지는 장면들이 늘었습니다. 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힘’이 더 강하게 작동합니다.
실력조차도 이상한 방식으로 증명됩니다. 압도적인 돈을 부어 설득하지 않으면, 실력이 실력으로 남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과물의 결보다 포장의 결이 먼저 만져지고, 깊이보다 속도가 먼저 소비됩니다. 손으로 만든 시간은 천천히 도착하는데, 세상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다른 것을 집어 들고 있더군요. 그 사이에서 오래 쌓아온 것들이 자꾸 음영으로 밀려납니다. 있는 건 분명한데, 보이지 않는 쪽으로.
가볍게 사라지는 걸 하고 싶은 마음은 아닙니다. 남기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오래 봐도 납득되는 균형, 쉽게 닳지 않는 감각,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설득 같은 것들. 그런데 세상은 사라지는 걸 해야 살아가게 만들고, 남기고 싶은 걸 하면 죽어가게 만듭니다. 과장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도 체감은 과장 쪽에 가까웠습니다. 지속이라는 말이 미덕이 아니라 부담이 되고, 완성이라는 말이 목표가 아니라 비효율처럼 불리는 장면 앞에서, 숨이 얕아집니다.
이런 세상에 살아가는 내가 싫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말을 계속 꺼내는 나도 싫어집니다. 투정처럼 들릴까 봐, 뒤처진 사람처럼 보일까 봐, 시대를 못 읽는 사람처럼 취급될까 봐. 말이 늘어날수록 내 얼굴이 납작해지는 느낌도 듭니다. 그런데 입을 다물면, 그건 체념이 아니라 자기 검열이 됩니다. 불편함을 못 본 척하는 순간, 나 자신을 속이게 되니까요.
그래서 요즘은, 체념에 가까운 표정으로도 계속 바라봅니다. 포기한 척하면서도 완전히 놓진 못한 채로.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무엇이 나를 흔드는지는 흐리지 않습니다. 사라짐과 남음 사이에 서 있다는 사실, 그 틈이 얼마나 차갑고 얇은지, 그걸 또렷하게 보는 쪽을 택합니다. 바꿀 힘이 없어도, 눈을 감진 않습니다. 오늘도 비슷한 마음으로 걸어가고, 비슷한 생각을 되짚고, 비슷한 결론에 닿습니다. 결론은 늘 희미합니다. 다만 희미함 속에서도, 지금 서 있는 자리만큼은 분명하게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