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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생각할 시간이 없다

_나의 소원은 정규직

by somehow Jul 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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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시킨 일도 아니라지만, 열악한 현실을 목도하고 고단한 노동에 허덕이다 끝내 버티지 못하고 돌아선 심정은 결코 산뜻하지만은 않았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하는 그들을 마치 혼자 살겠다고 그 자리에 버려두고 나 혼자 내빼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빠르게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나는 어느새 취업을 이어가기 위해 불타는 의욕을 깃발처럼 펄럭이며 사탕공장으로 향했다. 2주 전, 뜬금없이 일이 줄었으니 일시 대기하라던 사탕공장 아르바이트 일은 그 하루 이틀 이후 곧바로 재개됐으며 나 말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같은 자리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새 나보다 2주 정도 능숙해진 동료 H가 있어서 다시 돌아가는 게 다행히 부담스럽거나 어색하지도 않았다. 나는 지난 2주 동안의 아파트 미화원 생활을 재미없는 후일담처럼 늘어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거기에 비하면 사탕공장 일은 너무나 쉽고 얼마든지 할만한 일이었다.

다른 일을 해보니 여기만 한 일도 없더라며, 나는 사탕공장에서 더욱 열심히 오래 일하고 자는 의욕을 H와 함께 불태웠다. 사탕공장은 매일매일 전쟁터에 버금가는 속도와 물량을 소화해야 했다. 국내 수요뿐 아니라 중국 등 해외 수출물량도 적지 않아서 점심시간 1시간 외 일과시간 8시간 중에서 정해진 휴식시간 총 20분을 제외하면 한시도 쉬거나 농땡이칠 겨를이 없었다. 모든 작업장은 위생복이라고 하는 흰색 작업복을 입고 하얀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작업 중에는 반드시 니트릴 장갑이나 작업용 장갑을 착용해야 한다. 휴게실에서 작업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흰색 위생화로 갈아 신고 반드시 거치게 되는 소독실에서 손 소독과 전신의 외부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한 끈끈이 롤러질을 거치는 것은 물론, 소독기계에 걸어둔 실리콘 앞치마도 걸쳐야 한다. 일회용 마스크는 휴식을 위해 중간에 작업장을 벗어날 때는 버리고 다시 들어갈 때 새 것을 사용한다. 장갑 역시 작업장으로 들어가기 전 니트릴 장갑을 착용하고 나올 때는 벗어던지고 들어갈 때 새 것을 착용한다.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그것은 매우 철저하게 지켜졌다. 작업 중에 장갑이 훼손될 때도 있는데 그 즉시 새것으로 교체해야 하며, 작업 중 잡담도 철저하게 금지될뿐더러 모든 작업은 하루 종일 서서 이루어진다.

생산직의 특성상, 다양한 작업 진행과정에 따라 이리저리 이동이 잦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의자에 앉아 작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간혹 간이의자가 작업장 구석에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우리 아르바이트를 위한 도구는 당연히 아니다. 다만, 막대가 꽂히는 과일맛 사탕을 생산하는 과정은 가만히 앉아 집중해야 해서 그 일을 맡은 사람들 몇몇만 의자에 앉아서 작업했다. 그 일은 숙련이 요구되는 일인지라, 아르바이트 중에서도 경력이 오래된 이들만 할 수 있었다.

처음에 사탕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서서 일하는 것은 엄청한 고통이었다. 구제 분류작업장에서도 서서 일하기는 했으나 그 일은 한자리에서 작업이 이루어지는데 반해, 사탕공장은 서서 일할 뿐 아니라 반장의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수시로 이동하며 작업 과정상으로도 종일 팔다리가 쉬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퇴근 후에는 온몸이 천근만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르바이트만 채용하다 보니 인원이 수시로 들고났다. 초보로서 하루 이틀 일하다 고된 노동에 경악하며 그만두는 경우도 드물지 않을뿐더러 나처럼 며칠 일하다가 쉬었다가 다시 나오거나 하는 경우도 흔했다. 처음 나온 사람은 온종일 서서 일하는 것을 가장 힘들어했다. 내 경험상으로도 그 점이 쉽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사탕공장에 다시 출근한 2~3일째이던가, 알록달록 모양도 예쁘고 냄새도 달콤한 롤리팝 사탕을 포장하기 위해 기다란 컨베이어 작업대 앞에서 몇 시간째 그대로 서서 재빠르게 밀려오는 그것들을 집어내는 작업을 하던 어느 순간, 바로 직전까지도 허리와 다리가 아파서 온몸을 비틀어대던 나는 갑작스러운 편안함을 느꼈다.


그 순간을 나는 ‘경지’에 도달했다고 표현하겠다.

그렇다. 우습게도 바로 그 경지에 도달한 순간,
그렇게 아프고 좀이 쑤시던 허리와 다리에서 고통이 사라진 것이다.
마치 조금 어긋나 있던 아귀가 딸깍,
제대로 끼워 맞춰진 듯한 느낌이랄까.
그 후로는
아무리 오래 서있어도 아프거나 힘들지 않았다.
심지어 두 다리로 버티고 서있는 상태가 더 편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나는 생산직의 경지에 한 계단 올라섰다고 감히 생각했다.

그로부터 날마다 엄청난 사탕 더미의 무게에 새록새록 놀라면서도 정신없이 바쁘게 지나가는 일상에 익숙해져 갔다. 그 와중에도 H와 나는 아르바이트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규직으로 제대로 취업을 해야 한다는 것에 뜻을 같이했다. 둘은 틈틈이 워크넷이나 기타 여러 구인구직게시판을 확인하며 일자리를 모색했다. 그러던 중, 인근 K시에 새로 생기는 5성급 호텔에서 룸메이드를 다수 공개 채용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멀리 혹은 가까이로 여행을 갈 때면 가끔 마주칠 수 있었던 객실 관리인. 단정한 복장에 일정한 청소 관리 도구 수납 카트를 밀고 다니며 손님이 떠난 객실을 정리하는 그들의 일은 어떨까 하는 생각 또한 막연히 나의 의식 속에 있었다.

오호, 호텔 룸메이드! 촌구석의 싸구려 여인숙도 아니고, 적당한 시가지에 널린 무궁화 하나짜리 모텔도 아닌 초호화 시설을 갖춘 5성급 호텔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않을까.

구인공고를 확인한 순간 떠오른 생각에 또다시 열렬한 직업탐구와 도전의식이 나를 독려했다. 한번 채용설명회에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곧바로 연락을 취했고 1주일 후 참석했다. 그리고, 호텔 룸메이드를 모집하는데 얼마나 오겠나 싶었던 나는 깜짝 놀랐다. 적어도 30-40명이 넘는 내 또래 여인들이 관심과 열정 가득한 표정으로 몰려든 것이다. 호텔 측 채용담당자가 나타나 머지않아 준공될 호텔에 대한 정보와 채용 시 근무조건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날의 채용 설명회는 그야말로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정확하고 제대로 된 정보를 주기 위한 예비 일정으로, 정식 면접 절차는 다시 얼마 후에 열리는 채용박람회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날 설명회에 모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면접일시에 모일 수도 있으며 면접을 통해 당락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곳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높은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해대는 동안 나는 설명회가 끝나갈 때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려기로 했다. 면접을 보러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날 주워들은 정보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하루 8시간 근무, 주 6일인데 주말이 포함된다. 급여는 시급을 적용받는다. (정확히 생각나지는 않지만 2019년도 시급이 8350원인데 그보다는 몇백 원 정도 더 쳐준다거나 아니면 딱 시급만큼이라거나 했던 것 같다. 이 부분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분명 특이할 것이 없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그리고 보너스가 있다던가 없다던가 하는 것도 기억나지 않으며 처음에는 우선 3개월 계약직으로 일하게 될 것이며 그 후 상황에 따라, 혹은 근무태도에 따라 연장이 되거나 안 되거나...라고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호텔에서 일하게 되면 누구나 직원 할인을 적용받을 수 있으므로 혹시 그 호텔에 투숙을 하는 등 호텔시설을 이용할 때 유리하다는 설명도 뒤따랐다. 가장 중요한 객실 관리업무 중에서 침대 시트를 교체하는 등 청소 요령이나 기술에 관해서는 기본 교육이 이루어질 것이므로 초보자라도 열정만 있다면 무리 없이 해낼 수 있다.

나는 그저 막연히 짐작만 해왔던 호텔 룸메이드의 급여 역시 시급을 적용받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약간 당황스러웠다. 적어도 ‘5성급 호텔’이라니까 시급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후하게 노동력을 사주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은 오로지 무지한 나의 착각이며 왜곡된 선입견일 뿐이었다는 점에 스스로 놀라웠다. 나는 곧 착각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호텔 메이드라는 직종에 대해 특별히 불편하거나 편견 따위는 없다 해도 주말에 상관없이 주 6일간 일해야 하는 것과 무엇보다도 다른 생산직과 다를 것 없는 급여조건 하며, 3개월 계약직이라는 조건이 나를 빠르게 돌려세웠다.

그날 채용설명회에 가기 위해 나는 사탕공장을 하루 빠져야 했다. 아파트 미화원으로 2주 만에 도망쳐 다시 들어간 지 마찬가지로 2주가 흘렀을 때였다. 사탕공장은 개인적인 일이 있을 때 하루 정도씩은 쉬었다가 다음날 다시 나가면 되는 시스템이었다. 채용설명회에서 돌아오며, 당분간은 사탕공장에 다니며 또 다른 기회를 모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나는 다시 사탕공장 반장의 문자를 받았다.

'일이 점차 줄고 있어서 사람이 많이 필요 없다. 당분간 나오지 말아라. 필요해지면 다시 연락하겠다.'


이건 뭐,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이란 것! 하, 나는 한숨이 나왔다. 안 되겠구나. 여기는 언제든 잘릴 수 있는 파리 목숨이로구나. 또다시 실감했다.


반장의 말 한마디로 당장 다음날부터 다시 백수가 되는 것이다. 그 말대로 당분간이 하루가 될지 한 달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그냥 연락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다시, 그날 저녁부터 며칠 동안 나는 구인구직 사이트를 열심히 뒤지고 몇 군데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면접을 보게 되었다. 도농복합지역이기도 한 우리 시에 초콜릿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바로 그 공장에서 디저트 생산직을 정규직으로 뽑는다는 공고를 확인한 나는 막연히 이력서만 제출하기보다 전화를 걸어 곧바로 면접을 시도했다.

집에서 15-20분 정도 달려가 이력서를 내밀었을 때 담당자는 대뜸 내 나이부터 들먹였다. 나이가 좀 있으시네요... 하면서 힘들 텐데 할 수 있겠느냐고 불안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어제까지도 사탕공장에서 일했다며 그곳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설명하고 열심히 하겠다며, 꼭 일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참, 여기서 나의 이력서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고 가자. 생산직에 뛰어든 지 아직 1년은커녕 6개월도 되지 않은 초짜인 내가 이력서를 쓸 때 나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제 분류 사업장이나 미화원이나 사탕공장은 나의 과거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이력서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이 초콜릿 공장역시 10년 이상된 제법 알려진 대규모 사업장이었다. 정규직 생산 직원만도 50-60명이 넘을 정도로 체계가 잡힌 곳이라 아무래도 허접한 현재의 경력으로는 명함도 내밀기 어려울 듯했다. 그래서 나는 위조를 결심했다. 실제로 생산직에 뛰어든 시기를 지난 2-3개월 전이 아닌 최소한 7-8개월 전으로 조작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비록 사탕공장 알바일망정 비슷한 디저트류의 일을 적어도 6개월 이상 해온 것처럼 시기를 고쳐쓰기로 결심했다.

 

통틀어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일해놓고도 나는 오로지 취업을 위해, 일단 취업담당자가 이력서를 곧바로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지 않게 하기 위해 고졸로 이미 수정된 이력서의 썰렁한 아랫칸에 허황된 이력을 진지하게 새겨 넣었다. 


뭐, 이 정도야 어떠랴... 하며. 담당자는 나의 위조된 이력서를 들여다보며 경력도 짧다며 시큰둥했다. 그러더니 아르바이트로 먼저 해보겠느냐며 슬그머니 채용조건을 변경하려 들었다. 나는 일단 그렇게라도 해보겠다고 했다. 아르바이트라도 막 자르지만 않으면 어떠랴... 일단 취업이 우선이니까.


연락을 주겠다고는 했지만 정말 연락이 올 지 알 수 없었으므로, 나는 그 사이  지역 취업담당자의 알선으로 몇몇 군데 면접을 보러 하루 이틀 동안 가깝고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주파走破했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감탄고토甘呑苦吐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은, 시급은 다 같은데 하는 일은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또한 내 나이가 생산직에서는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연령대라는 사실도 한 번 두 번 실감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초조해져 갔다. 아르바이트를 벗어나 정규직은 못 되더라도 계약직이라도 되어봤으면 하는 바람이 풍선처럼 커져가면서 시간이 많지 않음을 깨달아갔다.

며칠 후,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초콜릿 공장이었다. 내가 하게 될 일은 초콜릿 공장에서 새로 론칭한 디저트 케이크의 생산 포장이었다. 디저트류라는 점에서는 사탕과 비슷하나 그렇게 무겁지도 않을 테니 반가웠다. 나는 새삼 또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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