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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가장 열렬한 나의 하루

_터널을 지나 터널 앞에서

by somehow


시작은 있으나 끝을 알 수 없는 터널을 달렸다.


원칙 하나, 뒤돌아보지 않기.

둘, 망설이지 않기.

셋, 정신 바짝 차리기.

넷, 묻지도 따지지도 말기.

다섯, 앞으로만 나아가기.


가끔 지루하긴 했으나 다 때려치우고 따뜻하고 편안한 안방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선택을 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가늠해왔기 때문이다.

내가 누려온 몇 가지 안 되는 호사와 변변찮은 사치일망정 모두 접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는 약간 망설인 감이 없지 않았음을 실토해야겠다. 어쩌면 실은, 그것 때문에 더 일찍 나서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내 의식 안에서 출렁이며 가끔 꿈틀거리며 깨어나는 열렬한 충동, 혹은 도발, 아니 사실은 무모하고 어리석을지도 모를 신념을 껴안고 안락한 울타리 탈출을 감행했다.


그리고 혹독한 겨울을 지나 봄이 익어가도록 나는 여전히 맨발의 마라토너처럼 차디찬 아스팔트를 달렸다.

열심히 해서 정규직 한번 돼보자는 꿈을 안고 시작했던 초콜릿 공장에서 항의 한번 못해 보고 허탈하게 돌아선 이후 며칠 동안 겪은 생산직 면접의 수많은 기회들은 희망과 절망을 넘나드는 초조한 시간들이었다.


나는 어느새 나의 신께 매달렸다.


저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소서.

앞서의 모든 면접 기회들에서 내가 그냥 적당히 타협하고 앞으로도 하루하루 비정규직으로 연명하기로만 결정했더라면 곧장 취업이 가능한 현장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길지 않은 생산현장 비정규직으로서의 경험상, 불현듯 한 해고의 아픈 추억이 보태질수록, 더욱더 안정된 정규직으로의 취업을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아무리 취업이 된다 해도 최소한 건강에 해가 될 것이 명백해 보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나름의 원칙에 따라 잔머리까지 굴리기 시작하자 과연, 내가 생산직으로라도 제대로 취업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지역 직업상담사에게서 또다시 새로운 연락처 하나를 전해 받았다. 하루에 몇 군데씩 며칠째 면접을 보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지쳐가던 날이었다.

뜻밖에도 그곳은 집에서 아주 가까운 위치의 또 다른 식품공장이었다.

젊은 여사장이 10여 년째 운영 중인 사회적 기업. 그녀는 나보다 7~8년정도 아래였음에도 그보다 더 어린 나이에 중병을 앓고 살아난 뒤 우연찮은 기회에 그 사업체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자수성가형 사업가인 그녀와의 첫 만남은 막힘없이 이루어졌고 이야기도 잘 통했다. 그녀와 대화하던 중 어느 결에 나의 숨겨둔 이력까지 털어놓게 되어버리기도 했는데, 오히려 그녀는 그런 나를 편견이나 사심 없이 인정하고 이해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그 자리에서 나를 채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일단은 계약직이지만 최소 1년 동안은 취업이 보장되며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계약은 연장될 것이며, 1년 동안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연차여름휴가도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동안 여러 곳에 다녀보아도 연차니 여름휴가니 하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던 나는 귀가 솔깃했으며 마음속으로 크게 안도했다.


아, 정말?! 이렇게 쉽게 취업돼도 되는 것인가?


한편으로는 기간의 정함이 없는 정규직이 아닌 점은 마음에 걸렸으나 처음 만난 여사장의 호기롭고 전향적인 스타일에 이끌리듯, 적어도 1년은 보장된다니 일단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날은 2019년 4월 12일.

면접을 본 그날이 금요일이었으므로 첫 출근은 곧바로, 월요일인 15일부터로 결정되었다.





그로부터 1년 4개월째인 현재까지 나는 그 식품공장에서 일하며 월급생활자로 살고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제로부터 지난 500여 일 동안의 나의 삶은 지루하고 어두운 터널을 마침내 벗어난 자의 안도와 닮아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처음에는 느닷없이 맞이한 눈부신 터널 밖에서 어리둥절한 심정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난 시간 동안 나의 첫 정규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마냥 쉽기만 하지는 않았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일을 하다 보니 마음이 맞아 일이 잘 진행될 때도 있고 서로 충돌이 일어날 정도의 사소한 갈등도 있었다.

현재 진행형인 변화무쌍한 경험과 인간관계에 관한 후일담은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나 정리되고 술회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월 말 즈음, 세상에 없던 바이러스 코로나 19가 창궐하기 시작하던 무렵까지도 계약직이었던 나는 뜻밖에도 해마다 계약서를 다시 쓰고 갱신해야 하는 계약직도, 무기 계약직도 아닌 정규직으로 완전하게 전환되었다. 다들 코로나 19로 인한 파장으로 하나둘 일자리를 잃어가고 회사들이 문을 닫거나 경영난을 호소하기 시작하던 무렵이었기에 더욱 의미 있는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나의 근무조건이 해고가 아닌 정규직 전환이라는 긍정적인 변화를 맞이하자 남편도 마침내 월급생활자로서의 나의 일상을 전면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나는 그저 그런 하루하루를 열렬히 살아가고 있다.


르포르타주를 마치며

이 글을 시작한 것은 지난 3월부터였다. 좌충우돌하며 헤쳐온 불과 600여 일 동안을, 지난 50여 년의 삶에서는 결코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던, 어쩌면 앞으로도 끝내 이해하지 못한 채 지나갈 수도 있었을 열렬한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온몸으로 부딪히며 나아온 초보 생산직 근로자의 삶을, 정리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그 하루하루 나는 가보지 않은 길을 비척이면서도 지치지 않으며 오직 나만의 궤적을 완성하기 위해, 두려움과 싸워가며 나아왔다.

맨 처음 문밖으로 무작정 나서던 순간의 초심과 감정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가능한 한 꼼꼼하게 더듬어 갈팡질팡 어지러운 발자국일 망정 낱낱이 채집하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나의 보잘것없는 기록은 나 이외의 타인들에게는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그저 막연한 잡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또한, 여기 미처 다 옮기지 못한 수많은 챕터들이 끝내 봉인된 채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의 막막하고 안이한 현실 너머로 용기 내어 나섰다. 물론 나만큼 용기 있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또한 알고 있다. 때로는 혹독한 눈보라 속을 헤매는 듯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두렵기도, 가끔 햇빛이 날 때는 곧 따스한 초원에 닿을 듯 기대에 젖기도 했다. 그러나 끝까지 가보려는 생각을 바꾸지는 않았고 지금쯤 아마도 첫 번째 터널을 무사히 지나온 듯하다.


지금 나는 터널 밖에서 새로운 터널을 마주 하고 있다. 그곳으로 다시 들어가 보거나 아니면 그냥 이 초원에서 한가로운 암양처럼 하루하루 자라는 풀을 뜯어먹기만 하거나 선택은 오로지 나의 몫이다.


한동안 망설였다.


꿀처럼 달콤한 풀 뜯기에 남은 생을 바칠 것인가, 다시 저기 보이는 터널을 탐험할 것인가.... 불현듯 들어섰다가 혹시 후회하더라도 문득, 궁금하다.




새벽 수영을 시작한 지 27년째인 올해는 1월 말부터 코로나 19로 인해 중단되었다. 새벽에 일어나던 버릇을 버리기 아까웠던 나는 그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이 글을 시작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새벽 4시 즈음 일어나 아침에 해야 할 일을 해치운 뒤, 5시쯤 이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약 1시간씩 매일 글쓰기를 이어왔다. 새벽 글쓰기가 익숙지 않았던 초기에는 모니터 앞에서 머뭇거리는 시간이 짧지 않았으나 어느새 익숙해졌다. 그럼에도, 거의 초고나 다름없는 원고를 매회 업로드하기까지 할애할 수 있는 시간들이 길지 않았으므로 비문은 물론 내용상 오류와 왜곡도 없지 않을 것이다. 생각날 때마다 수정을 반복하기도 했지만 이 글은 여전히 형식상으로나 내용상으로 완전하지 않음을 전제해야겠다.

수많은 오류와 불만족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 이 글을 일단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려고 마음먹었다.


월급생활자로서의 나의 생산직 근로는 지금도 매일매일이 다이내믹한 도전이며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다.

한때는 생산직으로 정년을 맞아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도전을 멈추지 않아야 나답다는 결론에 닿았다.

누구에겐가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니니 적어도 나는 스스로를 위해 열렬하고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도전이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나는 그때 다시 이 글을 시작해보려 한다.



나의 하루하루는
무모하고 열렬한 도전으로 점철되더라도
언제나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 틀림없다.

세상은 고통과 고난으로 가득하지만
그 하루하루 가장 열렬하게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나의 르포르타주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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