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

_나를 위한 변명

by somehow

솔직히, 나는 이 글을 빨리 끝내고 싶다.


처음 이 의 첫 문장을 시작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을 흘려보내야 했는지 헤아릴 수도 없다.


존재에 대한 정체성을 고민할 능력이 생기기도 전부터 나는 다만 몸과 마음이 조금 힘들었을 뿐이다.

그런 사연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털어놓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시간이 갈수록, 나이를 먹어갈수록 언제나 마음 한쪽이 무겁고 그늘은 넓어져갔을 뿐이다.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나는 절룩이고 뒤뚱거리며 쓸쓸하고 그늘진 골목으로 몸을 숨기고만 싶었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 갔다 오면 아무도 없는 집에서는 적막이 나를 반겼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밤늦게까지 자식들이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 돌아볼 겨를 없이 바쁜 부모님을 원망하지는 못했다.


해질녘이 되면 서둘러 저녁밥을 지어 보자기에 싸들고 어둑해진 골목을 돌아가는 숙제가 있었다.


아직 어린 손으로 설거지를 하거나 밥을 하거나 하는 일은 더욱이 쉽거나 즐겁지 않았다.

그럼에도 경험이 쌓일수록 밥하는 솜씨가 좋아졌음은 물론이다.

바보같이, 엄마에게 배운 대로 손수 지은 밥을 그렇게 싸들고 가는 게 싫어서 한 번씩 어린 동생과 서로 ‘네가 가라’고 미루며 다투기도 했다.


일터에 있는 부모에게 저녁식사를 가져다주는 일에는 우리 자매로서는 크나큰 의미가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함께 집 근처 시장에서 포목점을 운영했다.

어머니의 재봉틀이 밑천이 되어 시작한 맞춤한복집은 조금씩 커져 훗날 번듯한 포목점으로 자리 잡았다.

그럴수록 부모님은 더욱 열심히 장사에 매진해야 했다.

어머니는 밤낮없이 한복을 지어내야 할 만큼 바빴고, 곁에서 아버지는 전반적으로 가게를 관리하며 포목점에 오는 손님들을 상대함으로써 협업을 이루었다.

낮에는 두 사람의 손발이 제법 맞아서 장사는 잘 되었다.

특히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어머니는 알뜰살뜰 저축하는 것도 열심이었다.


그러나 밤이 되면, 해가 지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에게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공포와 불안의 타이머가 켜진다.


해질 무렵, 시장 남자 상인들은 자연스레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열심히 살아낸 또하루의 고단함을 한잔 술로 털어 넘기며 활기찬 내일을 기약하는 것이었겠지만,

우리에게는 술에 취한 아버지를 마주해야 하는 두려운 숙제가 주어지는 것이다.


아버지가 술잔을 기울이기 전, 서둘러 밥을 갖다 먹여야 한다!


그것이 우리 자매의 밥 배달 목표이며 역할이기도 했다.

다들 알다시피, 빈 속에 술을 마시면 빨리 취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출출하던 차에 술을 밥 삼아 허겁지겁 마셔버리고 취하기 전에 부랴부랴, 뜨신 밥이 식기 전에 들고뛰었다.

다행히 우리의 의도대로 아버지 입에 저녁 술잔보다 밥이 먼저 들어가면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았고, 그런 날이면 어머니와 우리 자매는 악몽과도 같은 길고 긴 밤을 공포와 눈물과 절망 속에 지새워야 했다.


언제부턴가 아버지는 술을 점점 자주 마시고 많이 마시며 주사도 심해져갔다.

말년에는 식탁의자 따위 가재도구를 집어던지기도 했으나 직접적인 물리적 폭행으로 이어진 적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집요한 언어폭력이었다.

술에 취해 어머니 손에 이끌려 비틀거리며 돌아오거나 아니면 더 늦은 새벽녘에 혼자 만취상태로 대문을 넘어들거나 간에, 그 밤은 세 모녀에게 잠은 다 잔 것이나 마찬가지인 날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마신 술이 다 깰 때까지 어머니를 잡아 앉혀놓고 주사를 늘어놓기 일쑤였다.

맨 정신일 때 어머니에게 기분 나빴던 일을 술기운에 의지하여 거침없이 푸념하고 화내며 욕설을 퍼부어대기를 날이 새도록 무한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 자매는 옆방에서 그 소리를 자장가 삼으려 애쓰며 잠을 청하지만, 술이 다 깨고 제풀에 지쳐 아버지가 잠들 때까지는 결코, 아무도 잠들 수 없었다.

내일 또 고단하고 바쁜 하루를 이어가야 하는 어머니는 처음에는 술주정을 들어주기도 하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피곤이 몰려올 때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는 아버지의 취중진담과도 같은 화풀이 주사에 대거리를 하게 된다.

그다음은 안 봐도 비디오.

어머니의 짜증 한마디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것처럼 아버지의 분노를 순식간에 극대화시키고, 끝내 온 동네가 다 알도록 전쟁과도 같은 부부싸움으로 밤새 이어진다.


다음날 학교에 가야 하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척, 아니 잠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우리는 금방이라도 폭발하여 산산이 부서져버릴 것만 같은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울고불고하며, 분노에 휩싸인 아버지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래도 안 될 때는 어머니가 그 자리를 피해야만 했다.

옆 동네에 이모네가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 집으로 몇 번이나 캄캄한 새벽에 아버지의 언어폭력과 괴롭힘을 피해 뛰어나가야 했는지.... 그런 날들이 하루 이틀, 일 년 이 년.... 얼마나 오래 이어졌는지 알 수도 없다.

그럼에도 자식들 앞에서 부부싸움하는 이들이 우리 집 밖에 없는 것은 아닐 거라고, 우리 자매만 그런 상황에서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 거라고, 나는 그렇게 위로하며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1999년 아버지가 폐암 판정을 받고 투병 모드에 들어가기 전까지 견디어야 했다.

뜻밖인 것은, 술을 그렇게 퍼마셨음에도 위암이 아니고 폐암이라는 점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술을 마시면 흡연도 함께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고, 술보다 담배의 해악이 더 크고 강력했다는 실제적 증명일 것이다.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의 아버지는 교양 있고 얌전하고 점잖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아버지를 완전히 미워할 수도 없었다. 평소의 아버지는 딸들에게 자상한 사람이었다.

손재주도 좋아서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앉은뱅이책상을 뚝딱뚝딱 직접 만들어 줄 정도였다.

그 작고 예쁜 책상 앞에 앉았을 때의 기분과 느낌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또, 이발사로 일했던 경력이 있는 만큼 어릴 때는 딸들의 머리를 직접 잘라주기도 했었다.

그뿐 아니다, 엄마에게는 용돈 달라 소리를 하기 어려워도 아빠에게 말하면 조금씩 몰래몰래 쥐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자상한 아버지가, 술만 마셨다 하면 하이드 씨가 되어버리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무서웠다. 술만 아니면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좋은 아버지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나에게 애증의 대상이었다.


사랑하면서도 끔찍이 증오스러웠던 존재.


어찌어찌 아버지가 밤샘 횡포 끝에 쓰러져 잠들고 나면 날이 밝아온다. 어머니는 동생은, 그리고 나는 말할 수 없이 서글픈 심정으로 힘겨운 하루를 시작한다.


그럴수록, 생계를 주도적으로 떠맡은 것이 분명한 어머니의 목소리는 더욱 크고 거칠어져 갔다.

얼마나 힘들고 고단했을까,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바쁠 때는 몇 날 며칠씩 타이밍이라는 '잠 안 오는 약'을 먹어가며 어머니는 날이 꼴딱 꼴딱 새도록 한복을 수십 벌씩 지어내야 했다. 그러고도 한숨 돌릴 겨를도 없이 시내에 있는 도매시장으로 물건을 떼러 갔다. 돌아온 뒤에는 점포에 다시 들어앉아 한복을 짓거나 한복을 맞추러 오는 사람들을 상대하거나 하며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살아냈다.

그러고도 드물지 않은 밤마다 남편의 언어폭력,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과도 같은 술주정에 시달리며 고통받았다.

잘 못 꿴 가족일 망정, 어머니는 두 번 다시 후회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무거운 죄의식과 책임감을 동력으로 제 살과 뼈를 깎아내며 피와 눈물을 짜내어가며 그 긴 세월을 버티어냈다.

지쳐 쓰러질 듯 고통에 몸부림칠 때면 어머니는 비통하게 흐느꼈다.

내가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그렇구나....

어쩔 수 없이 삶에 지친 어머니는 그럼에도, 정신 잃지 않기 위해서인 듯 더욱더 목소리 크고 억척스러운 여편네가 되어갔다. 삶의 무게와 해소될 길 없는 피로와 그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 때문에, 한가하게 신세타령이나 하는 아버지를 향해서는 당연한듯 더욱 거칠고 사나워졌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지나온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과 가장으로서의 무력감과 아내에게 수모를 견디며 분노를 쌓았을 것이다.

낮의 제왕에게 당한 모욕감과 자괴감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밤의 폭군 자리를 노리는 역적과도 같이, 아버지는 술의 힘을 빌어 오랜 세월 집요하게도 항거를 일삼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칼만 들지 않았을 뿐 서로 밤낮을 바꿔가며 그토록 상처 주고 할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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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런 부모를 이미 이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우리는 너무나 아프고 힘들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나는 점점 말 없는 아이가 되어갔다.

말없고 내성적이며 자신감 없는 아이는 커갈수록 사람들과 좋은 관계 맺기가 가장 힘들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일에도 자신 있게 도전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성을 유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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