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버린 가족들이 있다.
나는 언제부턴가 그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비밀스런 과거에 대해 충분하고도 자세한 정보를 제공한 적이 없기에, 나는 다만 어머니의 입을 통해 분절된 몇몇 내용들만 간간이 전해 들었을 뿐이다. 그중에는 세 명의 자녀와 배우자에 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아무리 그 입장에서 전면적으로 옹호하는 심정으로 헤아려보려 노력해도, 나는 결코 아버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나름으로서는 도저히, 절대로, 견딜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었기에 가족을 버리고 장남이면서도 가문을 버리고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은 채 빈털터리로 세상 밖으로 탈출한 것일 테지만 말이다.
어머니와 새로운 가정을 이룬 뒤에도 아버지는 몇 번인가 다시 돌아가려고 시도한 적이 있는 것 같다.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자신들의 첫 번째 가족 혹은 자녀들을 버렸다는 그들 나름대로의 죄책감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없었기에, 두 딸이 태어난 뒤에도 더 늦기 전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막연한 시도를 했던 것일까.
그런 언젠가 아버지는 정말로 처음의 아내와 자녀들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어머니의 동의 아래, 우리를 또 남겨둔 채로.
그러나, 얼마 후 아버지는 다시 돌아왔다. 뜻밖에도 아주 거지꼴을 하고서!
그러니까 수년 만에 다시 찾아간 가족들은 특히 그 아내는 남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얘기다. 어떻게든 그곳에서 다시금 정 붙이고 살아보기 위해 아버지는 한동안 노력했다. 허나 끝내 그녀는 남편을 용서하지 않았으며 이번에는 자신이 철저하게 개 쫓듯 내쫓아버렸으며, 비참한 몰골로 돌아온 아버지를 어머니는 다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오래전 언젠가 어머니로부터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아직 어린 나로서는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돌아갔으며 왜 도로 내쫓는가... 그러고도 끝내 이혼도 해주지 않는 그 아내는 또 왜?
시간이 흐른 뒤, 불현듯 그 가족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피해자에 다름 아니었다.
원치 않는 배우자가 되었어도 그 아내는 아이들을 셋이나 낳으며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버림받음으로써 남편에게 배신을 당했을 뿐 아니라, 일말의 잘못도 없는 세 자녀들도 하루아침에 애비없는 자식으로서의 고통스러운 삶의 벌판으로 내몰렸음에 틀림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나만, 우리 자매만 이렇게 힘들었다고 얘기할 게 없어 보였다. 내 어머니 아버지의 선택은 세 가정의 자녀들 모두를 혼돈과 상처와 고통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인생에서 '선택'이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훗날, 나의 어머니는 뜻밖에도 아버지의 이전 가족들에게는 더더욱 죄인처럼 살아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 집안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머니는 예전의 가부장적 사회의 사고방식으로 용인되는 이른바, '작은마누라'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집안에 어떤 큰일이 있을 때면(어떻게 연락을 주고받는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 자신이 밤낮으로 고생하며 벌어 모든 돈을 한 번씩 목돈으로 아버지 손에 들려 보내곤 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개 쫓듯 쫓겨나고도 큰일이 있을 때면 그렇게 한 번씩 손 벌리는 제 가족을 찾아가, 내 어머니가 불철주야로 고생하며 한 푼 두 푼 필사적으로 벌어 모은 돈을 내놓으며 의미 없는 애비노릇을 하고 왔다는 아버지.
그는 그렇게라도 자신이 버리고 온 가족에 대한 죄의식을 보상하려는 의도였을까.
나도 희미하게 기억한다. 한 번씩, 아버지가 ‘시골에 다녀온다’며 사라지곤 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때 철없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의 눈물과 피땀 어린 돈뭉치가 아버지의 가족들에게 흘러가고 있었다는 사실 따위는.
그러한 모든 진실에도 불구하고, 그들 또한 명백한 피해자들임에 틀림없었다.
그 아내가 끝내 이혼해 주지 않은 것 또한 그 자신의 복수심과 분노의 표현이었으며, 자신이 평생 온전히 책임져야 했던 가장으로서의 무게와 최후의 자존심에 다름 아니었음을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세 자녀들 역시 이제는 어디선가 나처럼 나이 들고 늙어가고 있을 테지만, 성장하는 동안 그들이 느꼈을 고통과 분노와 슬픔의 무게를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들 또한 나처럼, 아니 어쩌면 나보다 힘든 시간을 온몸으로 관통하며 좌절과 아픔을 문신처럼 새기며 살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폐암으로 입원 중인 병원에 아들이 한번 찾아왔다고 했다.
나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
평생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의도적으로 궁금해하지도 않고 살았으나, 아버지의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그가 세상을 떠나면 알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께 그가 찾아오면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었다.
그 후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자신의 죽음이 머지않았음을 알렸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가 아버지를 만나고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화가 났다.
아버지는 나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에게 진짜 자식은 그들뿐이었을까.
나에게는 왜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토록 철저히 감추려 하는지 화가 치밀었다.
얼마 만에 부자가 상봉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아들은, 아버지에게 ‘돌아가시면 연락하세요’라는 싸늘한 한마디만 남기고 돌아갔다고 했다.
당신이 돌아가면 연락할 사람이 나인데, 왜 나에겐 그 존재를 설명하지 않는가...
그로부터 얼마 후 아버지는 정말로 세상을 떠났다.
폐암 선고를 받고 거의 1년 만이었다.
파란만장하고 희로애락 애오욕으로 얼룩진 69년의 생이 마침내 긴 휴식에 들어갔다.
끝내 얽힌 실타래 같은 삶의 매듭을 풀어보려는 노력을 스스로 다하지 못한 그의 생이 안타까울 뿐, 나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담담했다.
심지어는 투병하는 1년이 길게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도의적으로 애써 아버지를 챙기려 노력했으나,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게도 나는 어쩐지 냉랭했음을 이제야 실토한다.
아버지가 사실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셨음을 알고 있다.
그 자신이 무능한 현실 부적응자로서 긴 세월을 부질없이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스스로 용납하기 어려워 술과 담배를 벗 삼아야 했을 뿐이리라.
이제와 생각한다,
한 인간으로서 아버지도 얽히고설킨 운명의 덫에 걸린 피해자이며 한없이 나약하고 가여운 존재에 다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