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과거를 견디고 장애를 극복하고, 나아가 크고 단단한 성취를 이루었을때, 자부심을 느낀다. 그 장애와 역경이라는 것이 자신의 의지와 노력과는 상관없었던 출생즈음부터 시작되었고 성장과 더불어 함께 자라나는 그것들을 가지쳐내지 않으면 생존조차 위협받을 정도였다면, 그래서 마침내 모든 역경의 가시덤불을 헤치고 살아나온 자로서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스스로에 대한 대견스러운 심정.
누구라도 그런 사실을 폄훼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녀의 자부심은 검소함을 넘어 구차스러울 정도로 열악한 사무실의 한쪽 벽면에 잘 도배되어 있었다. 내가 처음 면접을 보러 갔을때, 온갖 상장이 들어있는 액자들과 그 자신에 대한 기사문 따위로 가득한 이른바, 인포메이션 월은 더팩토리_D의 사장과 그녀의 자부심을 매우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었다. 슬쩍 시선을 돌려 보기만 해도 감탄과 존경심이 무작정 울컥할 정도라고나 할까.
그러한 자부심은 물론 사장의 과거를 지나 현재에 이르고 미래를 향한 큰 그림으로 이어지는 동력임에 틀림없어보였다.
그토록 고단한 시절을 견디고 극복한 스스로가 약관 30대에 창업을 하고 여성발명가로서의 타이틀을 획득하고 마침내 사회적기업 인증까지 받으며 참 좋은 회사라는 이미지를 완성하도록 쏟아부은 땀과 열정은 충분히 대단한 것임에 분명했다.
직원들 누구나, 뿐 아니라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물론, 처음 사무실에서 그 벽을 목격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의 참을 수 없는, 감출 수 없는 자부심은 시시때때로 아무때나 그 자신의 한없이 가벼운 입을 통해 설파說破 되었다.
뭐 한두 번은..., 입사초기 회의시간마다 그 자신의 지난한 노력의 힘겨움과 빛나는 열매의 소중함에 대해 들을 때면 그러려니했다. 벌써 창업 10년이 넘어갈 동안 힘든일이 어찌 없었겠나 싶고 그런 고생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저 나이에 맞지 않게 괴퍅스럽고 이기적이며 독단적인 성향도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것이리라 이해했다. 충분히.
하지만, 그 회를 거듭할 수록 모두들 지쳐갔다. 심지어는 어느 날에도 회의랍시고 모두를 비좁은 회의실 탁자앞으로 모아놓고는, 어쩌고저쩌고 해가며 직원들의 잘잘못을 따지다가도 뜬금없이 자기가 얼마나 힘들게 고생하가며 살아왔는지 떠벌이다가 저혼자 감상에 빠져 울먹거리곤 했다. 이게 갑자기 뭔 짓?
머릿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면서도 시치미떼고 사장님의 말씀을 듣고 앉아있던 나는, 우리들은, 그럴 때면 늘, 순간적으로 매우 당황스러웠다.
우리들, 일이 없어 온종일 하는 일도 없이 그저 월급이나 축내는 한심한 직원들과 달리 충분히 자부심 가득한 스스로의 현재의 뒷면에는 지나온 시간들의 눈물겨운 과거가 새겨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종종 그녀의 자부심은 동시에 그토록 눈물어린 자기연민으로 느닷없이 발현되고는 했다.
물론 우리는 다 이해했다. 회의 도중 화를 내다가 갑자기 과거 얘기를 하다가 울먹이는 것까지도, 나는 그러려니 했다. 참 많이 힘들었겠구나... 여기까지 오느라 참 애썼겠구나 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말했다. 툭하면 저래요... 감성팔이한다고 생각해요. 지원금신청하거나 뭐 그런 사업계획서 쓸 때도 자기 힘들었던 얘기를 꼭 집어넣어서 동정심 유발한다고 해야하나...그렇게, 어떻게 해서든 따내기만 하면 되니까...
그여름 땡볕에 땀 목욕도 마다 않고 우리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오로지 노동력만으로 창고의 물건들을 옮기고 다시 채워넣고 한 이유는 오로지, 직원휴게실을 만들어 주겠다는 감언이설에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감언이설.
그렇다. 결국, 우리의 희생은 사장의 교활한 감언이설에 놀아난 뻘짓에 불과했음을 알게 된 것은 얼마후였다.
창고가 옮겨지고 직원휴게실용 새컨테이너가 그자리에 들어온 뒤, 일은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싱크대를 옮기고 냉장고와 에어컨을 갖다 넣고...신발벗고 들어가 다리 뻗고 쉬는 방 타입의 휴게실은 물건너간 것이 명백한 다음 날, 가구점에서 트럭이 도착했다.
-이제부터는 점심시간에 여기서 여러분과 함께 식사하려고 식탁세트를 샀어요! 하하하.
그즈음부터이던가, 코로나때문에 식당에 가는 것도 걱정되니 점심도시락을 배달시켜 먹기로 했던 것이다. 휴게실이 없던 시절에는 사무실에서 코를 맞대고 앉아야 했으니 아무래도 그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결정했다는 듯이.
그러나 휴게실에 들여지는 식탁세트의 실체를 보고 모두들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거 내가 80만원이나 주고 고급식탁세트를 샀어요!
자신이 지불한 액수를 몇번이나 떠벌이며 사장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드넓은 가정에나 어울릴 법한 고급 원목 식탁세트를, 그것도 8인용 정도 되는 것을, 심지어 자기 돈까지 써가며 들인 것이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회사에서 쓰는 식탁용 가구라면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굳이 새것이 아니더라도 멀쩡한 중고가구로 들여도 충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굳이, 평소 자기 돈 쓰는 것을 끔찍이도 아까워하는 사람이 도대체 무엇때문에 점심용 가구에 돈을 처바르는 것일까.
답은 곧 밝혀졌다.
직사각형 휴게실 내부의 왼쪽에는 싱크대와 냉장고와 에어컨이 자리잡고, 가운데는 고급가정용 원목 8인용 식탁세트에 창고에 있던 싸구려 테이블까지 이어붙이자 거의 20여명까지도 앉을 수 있을만큼의 공간이 세팅되었으며, 나머지 오른쪽 벽과 맞닿은 공간에는 더팩토리_D의 역사와 제품들을 간단히 전시할 수 있도록 책장들이 들어찼다.
-이곳에서 품평회를 열 거에요.
휴게실을 만들어 주겠다며 큰소리를 치고 일사천리로 마무리가 되자, 사장이 내뱉은 말이다. 그러니까, 앞서 참가한다던 전국특산품경진대회라던가 하는 그 대회의 현장 심사를 받기 위해 바로 저 직원휴게실 명목의 공간을 허겁지겁 완성해야 했던 것이다.
심사를 위해 심사위원들이 현장실사를 나오는데, 그때 십여명 정도 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제품에 대해 설명하고 그들의 품평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 전까지, 더팩토리_D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공간이 없었기에 이번 기회에 직원휴게실을 설치하는 조건으로 지원금을 받아서 그것을 이토록 지혜롭고 알차게 유용할 큰그림을 계획했던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잔대가리,아니 큰그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모든것이 이해가 되었다. 어느날 갑자기 기대하지도 않았던 직원휴게실을 운운하며 직원들을 동원하였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솔직하게 이야기했어도 되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본심을 숨겨야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품평회때 사용할 공간이 필요하고 직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어도 우리는 아무 불만없이 따랐을 것이다. 불만이라니? 그역시 얼토당토않은 표현 아닌가. 사장님이 시키시면, 원래 하기로 돼있지 않은 풀베기며 타회사에 원정 근무까지도 말없이 해내는데, 대체 왜 그렇게 사람 뒤통수치듯이 꼭 그래야만 했는지...지금도 이해 안 되기는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