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오늘 우리 아이들의 초상
고등학교 1학년 수연이는 부스스한 얼굴로 가방을 메고 독서실 문을 나섰다.
일요일 하루 해가 어스름해지는 시각이었다.
‘어휴…또 하루 해가 지는구나…지겨워…’
일요일 하루도 집에서 편히 쉬지 못하는 것이 불만인 수연이는 아예 아침 일찍 가방을 싸들고 동네 독서실에 가는 일이 규칙적인 주말 스케줄이 되어 있었다.
‘일주일에 하루는 집에서 좀 쉴 수 있었으면 좋겠네…’
수연이는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큰 부모님 눈치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이었다.
“그래, 공부도 습관이라 하루라도 쉬면 그만큼 능률도 떨어지고 하니까 독서실에서 문제 하나라도 더 풀어보는 게 좋지!”
그날 아침에 집을 나설 때도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옆에 있던 중학생 남동생이 이죽거리듯 이렇게 중얼거렸다.
“치…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성적은 왜 그렇대?”
“뭐야?! 너나 잘 해!”
동생의 말에 수연이는 왠지 뜨끔함을 느끼며 도망치듯 골목으로 나섰다.
‘그래 맞다…우등생 애들만 다닌다는 독서실엘 다녀도 성적은 늘 낙동강 오리알인지 메추리알인지…어디로 떠가는 지도 모르겠네…어휴…’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독서실 지정석에서 하루종일 이 책 저 책 뒤적여가며 나름대로 공부를 한답시고 앉아 있었지만, 수연이 머릿속은 어느 자욱한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집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 수연이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수연아! 어디 가니?”
밝은 목소리와 함께 다가온 것은 중학교 동창 은정이였다.
중학교 졸업 후 예고에 진학하여 무용을 전공하는 은정이는 발랄한 표정이었다.
“은정아! 오랜만이다. 학교가 달라지니까 이렇게 얼굴 보기도 힘들다! 잘 지냈어?”
“그럼! 나야 거의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하지. 넌 얼굴이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 무슨 일 있니?”
시무룩해 보이는 수연에게 은정이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우등생 독서실>에서 하루 종일 공부해서 그런가? 호호~”
수연이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얼버무렸다.
“우리 오랜만에 수다 좀 떨다 갈래? 호호~”
은정의 제안에 둘은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밀렸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은정아 넌 무용하는 거 힘들지 않아? 하루 종일 연습만 할 때도 있잖아? 어휴, 나 같으면 못 할 거 같다!”
“당연히 힘들지! 근데 나는 무용이 정말 재미있고 신나! 그래서 하루 종일 해도 그렇게 힘들지 않아. 나중에 멋진 발레리나가되고 강수진처럼 세계적인 무용수가 되어서 전세계 사람들 앞에서 멋진 공연을 한다고 생각하면 막 힘이 솟아난다~!”
“야 정말 부럽다! 그렇게 좋아하는 일이 있다니! 난 하고 싶은일도 좋아하는 일도 장차 되고 싶어 하는 롤 모델도 없어…! 하루하루가 지겨울 뿐인데…”
“무슨 소리야? 너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도 상위권이었잖아? 나중에 세계적인 건축가가 되는 게 꿈이라고 하지 않았어? 난 공부에 취미가 별로였잖아…공부 잘하는 니가 부러웠는데…왜 그래?”
은정이의 물음에 수연이는 쓴웃음을 날리며 혀가 아리도록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글세…그땐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이젠 모든 게 귀찮고…성적은 계속 어딘지 모를 낯선 곳을 헤매고 있는데…엄마 아빠는 옛날 생각만 하고 나를 달달 볶아대고…그렇다고 친구가 많아서 신나게 놀기라도 하나…그냥…하던 대로…할 게 없으니까…하고 싶은 게 없으니까... 그냥 책만 열었다 닫았다 하는 거야…열었다 닫았다…학교에서... 집…독서실…집에서 학교…왔다 갔다…”
수연이의 무기력한 대답에 은정이는 답답한 듯 이렇게 되물었다.
“그럼…너 취미도 없어? 뭐…수영이나 자전거나, 아니면 요즘 인기 있는 골프 같은 거라도. 아니면 악기를 연주하거나…공부가 지겹고 힘들면 다른 걸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냥 그렇게 마지 못해서 왔다 갔다 하는 건 의미가 없어. 너희 부모님은 네가 아직도 공부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셔서 좀 더 잘하도록 격려하시는 걸 거야. 근데 자신이 그렇지 않다고 느낀다면 이제부터라도 네가 잘 할 수 있는 다른 걸 찾아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나 봐, 공부에는 관심 없고 춤추고 노는 거 좋아하니까 무용에 관심을 갖게 됐고 즐겁게 열심히 노력하니까 근사한 목표도 갖게 됐잖아! 너도 할 수 있어! 공부만이 다가 아니야, 수연아!”
“그렇구나…넌 정말 즐거운 일을 찾은 거네! 근데 난 아직 뭐가 즐거운지 모르겠어…학교에 가도 재미없고 집에서도 그렇고…별 의욕이 없어…왜 살아야 되는지도 모르겠어…사실…장래 뭐가 되고 싶다는 희망이 없으니까…”
수연이는 이미 자신의 삶의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노력하는 은정이가 한없이 부러웠다.
그날 밤, 수연이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집어던지고 책상 위의 물건들을 내팽개치며 손에 잡히는 책들을 모두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아악---! 다 싫어! 다 꼴도 보기 싫어… 지긋지긋해…! 죽어버릴 거야!”
요란한 소리에 뛰어온 가족들은 뜻밖의 상황에 놀라고 말았다.
“얘! 왜 그러니? 무슨 일 있었니? 느닷없이 이게 무슨 짓이야?!”
“지겨워! 난 왜 사는지 모르겠어! 시계추처럼 멍하니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지루해! 아무 것도 하고 싶은 일도 없는데 왜 공부를 해야 되는데?”
갑작스런 딸의 행동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부모님은 서둘러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는 네가 원하는 건 부족하지 않게 채워주려고 노력한 죄밖에 없는데 왜 그러는 거냐!? 부모 말 잘 듣고 얌전하게 공부만 하는 줄 알았더니 대체 무슨 일이냐, 응…?! 하고 싶은일 이 없다니! 참나, 공부만 잘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정신 차려, 녀석아!”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다른 사람과 비교함으로써 불행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현재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함으로써 불행한 경우도 있다.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우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필요하다.
나는 매우 소중한 존재이며 어느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존엄한 존재임을 안다면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다.
그러면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
즉 자아존중감도 커지게 된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생각을 하고 진취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는 의식을 갖는다는 점일 것이다.
그 ‘목표’가 때로는 큰 고통을 주고 더욱 노력해야 할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는 다시 힘을 내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연에게는 바로 그런 ‘목표’가 부재하다. 스스로 중요한 존재이며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의지를 상실한 상태이므로 무언가 되겠다는 목표도 있을 수 없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두운 바다 한가운데서 위태로운 작은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희미하나마 빛나는 등대가 있기 때문이다. 등대를 목표삼아 온 힘을 다해 나아가는 과정을 통해 생존의 기술과 삶의 소중함을 깨닫듯 수연에게도 구체적인 목표가 생긴다면 삶은 좀 더 달라질 것이다.
이야기 속 수연이는 무력감으로 인해 현재 자신의 모습과 능력을 인정하기보다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더욱 의기소침해지고 자존심이 매우 훼손된 상태이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공부를 제법 했으나 고등학교에 오면서 생각대로 성적이 오르지 않으니 공부에 대한 의욕이나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도전의식조차 약해진 것이다. 수연이 다시 예전처럼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하며 긍정적인 목표의식을 가지고 노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친구 은정이도 이야기했듯 공부를 잘 해왔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공부만 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공부에 지쳤다면 정신수양에 도움이 되는 좋은 취미활동을 시작해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자전거 타기나 수영, 탁구 등의 운동이나 요리, 무용, 그림, 악기 연주 등의 다양한 취미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일류대학의 좋은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무슨 취미활동이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좋은 취미활동은 공부시간을 뺏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에 활력을 주며,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갖게 하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물론 공부는 팽개치고 취미활동에만 몰두한다면 곤란하겠지만 잠깐의 취미활동은 마음의 휴식을 가져오고 정서적 안정을 준다.
취미로 시작한 활동에서 한걸음 나아가 뜻밖에도 숨겨져 있던 자신의 재능을 발견할 수도 있다.
재능을 발견하면 새로운 목표가 생길 수 있다. 무용이 재미있어서 열심히 하다 보니 장래의 원대한 목표를 스스로 세우고 도전하게 되는 은정이처럼.
불행히도 오늘날 우리의 학교 현실은
마음 편히 여가활동을 즐길 시간을 주지 않는다.
수연의 갈등과 불행도 바로 여기서 출발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읽고 싶은 만화책도 읽을 시간이없는데
몇 시간씩 쏟아가며 취미활동이라니!
왜곡되고 뒤틀린 청소년 시절의 초상은
‘지금이 어느 땐데? 그건 시간낭비야!’ 라고 비난을 퍼부을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해 갈등하고 절망하며 길 잃은 돛단배처럼 폭풍우 속을 헤매는 수연이와 우리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용기가 아닐까.
힘들고 지쳐 쓰러질 듯 한데도 공부 외에는 아무것에도 한 눈 팔아서는 안 되는 불편하고 슬픈 현실에서 한걸음 밖으로 용감하게 나서야 한다. 그리고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 풍요로운 삶을 위해 정말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찾아나서는 것이다.
그러면 어쩜 수연이는 멋진 악기 연주자가 될 지도 모르고, 또 다른 수연이는 유명한 헤어디자이너, 혹은 세계적인 요리사가 될 지도 모른다.
똑같은 줄 위에 세워놓고 순서를 정하는 공부놀이는 사실 이젠좀 식상하다!
수학공식을 외우고 원자기호를 외우는 지루하고 획일적인 학습을 강요하며, 교실 밖에서 즐겁게 배우고 얻을 수 있는 더 많은 것들을 접할 기회를 박탈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것을 찾아 나서는 또 다른 수연이를 가로막을 권리도 없다. 용기 있게 나서라. 용기 있게 찾아나서는 자만이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다.
나의 삶은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201311 다시읽기*청소년을 위한 사랑의 기술 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