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을 떠올릴 때면, 나는 부모와 동생과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삶을 살던, 그 작은 방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방은 작고 따뜻했다.
오래전 가난한 그 시절, 흔히 여러 가구가 한 마당을 같이 쓰는 남루하고 오래된 집의, 툇마루로 길게 이어진 여러 개의 방들 중 하나에 나의 가족은 들어있었다.
그 옆 방에는 당시 양색시라고 하는 김양아줌마가 살았다.
그 방에는 미군들이 드나들었다고 기억된다. 빨간 입술이 떠올리게 하는 김양아줌마는 예쁘고 젊었으며, 아침이면 마당가에서 웩웩-토악질을 하기도 했다.
내가 김양아줌마라고 불렀던 그녀는 나를 예뻐했다. 엄마도 그녀와 특별히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던것 같다.
어쩐 일인지, 나는 지금도 가끔 그녀가 생각난다.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만약 아직 살아있다면 얼마나 늙었을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훗날, 국민학교1학년이 끝날 무렵 시작된 가족의 서울살이 이후로 한 번인가 그녀를 서울에서 본적이 있는 것도 같다.
어찌어찌 엄마와 그녀가 만나는 장면이 꿈결인듯 생각나지만 그것은 어쩌면 현실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빨간 입술이 예뻐서, 내가 잘 따랐던 그녀가 그리운 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곤 한다.
그 작은 방에 살 때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김양아줌마를 찾곤 했던 어떤 미군이 찍어 선물했다는(어머니가 얘기해 준 사실이며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흑백 사진 두장이 내 가족의 사진첩에 들어 있다. 대여섯 살 즈음의 어느날 마당에서 놀고 있던 나와 내 동생의 얼굴을 각각 찍은 그 흑백사진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그 사진은 놀랍게도 A4사이즈 남짓하게 확대되어 하드보드지에 잘 붙여져 있다.
사진 속 우리들은 촌스럽고 어리고 한없이 선하고도 서글픈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그것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사진을 찍어준 이의 진심과 애정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사진을 볼 때면 촌스럽고 순박한 이국의 어린아이를 진심으로 애틋하고 다정하게 바라보았을 어느 미군의 따스한 마음이 전해져온다. 그리고, 내가 얼굴을 전혀 기억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저 사진 너머에만 영원히 존재하는 그 고마운 사람이 궁금해지곤 한다. 그와 함께 안타까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나는 끝내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춘천에서의 또다른 기억은, 오래전 헤어진 친구와 맞닿아 있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방보다 더 앞서 부모님은 어느 부잣집 문간방에 살았다고 한다. 그 안집에는 자녀들이 많았는데 그중에 두 딸이 나와 비슷한 나이였다. 뿐만아니라 처지가 매우 비슷했던 어머니와 그 집 여주인은 친한 친구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두 딸중 작은 아이가 나와 동갑이었고 그 위로 한두살 많은 언니가 있었다.
이름은 선미와 영미.
막내인 선미가 나와 같은 1학년이 되었을 때는, 우리 가족은 그 집에 살지 않았음에도 내가 그 아버지의 자가용을 함께 타고 근처의 국민학교에 등교한 기억이 있다. 그 아버지는, 자동차정비공장같은 것을 운영하는 사장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곳에도 가본적이 분명 있었다.
그것은 아주 어릴적의 일이어서 이렇게 '지금도 기억하는게 정말 사실인지' 가끔은 스스로 의문이 들기도 한다. 내 기억에, 선미 아버지(자동차정비공장사장님)는 당시 어떤 암에 걸린 상태였고 몇년동안 투병하다가 결국 돌아가셨다.
국민학교 1학년에 들어갔을 때도 엄마와 선미어머니의 왕래는 이어졌고 종종 그집으로 엄마와 함께 놀러갔던 기억도 남아 있다.
특히 그즈음의 충격적인 사건 또한 내게는 여전히 생생하다.
그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어느날 학교에서 산수문제가 가득 적힌 문제지같은 걸 나눠주고 그것을 집에서 풀어오는 숙제를 내줬다. 그 날도 나는 선미네 집에서 선미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각자의 숙제를 풀고 있었다. 그때 선미가 말했다.
-우리 서로 바꿔서 풀자!
나는 그때 아무 생각없이 내 문제지를 그애와 바꾸어 열심히 풀었다. 문제를 다 푼 다음에 서로 다시 바꾸었을 때, 두 엄마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숙제 다 했니?
그리고는 엄마가 각자 이름으로 된 두 아이의 문제지를 들여다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으이그, 넌 다 틀렸네! 선미는 다 맞았구만.
선미가 다 맞혔다고?
그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서로 바꿔서 풀자고 하던 그 아이의 심리를 천진난만하기만 했던 나로서는 짐작도 못했던 것이다. 그제야 어렴풋이 선미의 의도가 짐작되었지만 나는 왠지 즉시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당사자인 선미역시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는 점이다. 그 태도에 나는 아마도 배신감을 느꼈던 것같다.
철부지 어린 나의 마음은 상처받았고 좌절감을 느꼈다.
무의미하고 무모하지만....그때 일을 나는 47년여가 지난 이제야 처음 글로써 고해해본다. 언젠가는 그때의 억울함을 꼭 입밖으로 토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별일 아닐 수도 있는 그 사건은, 어린 시절 내가 겪은 최초의 좌절과 절망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왜 당당하게 진실을 말하지 못했는지, 그 당시에도 지금도 여전히 나는 억울하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선미가 그 시절의 유일한 친구였다고 기억한다.
당시의 국민학교 1학년이었던 내가, 서울로 이사하면서, 그저 그렇게 물리적으로 멀어지고 더이상 만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인지 나에게 춘천은 선미와 그사건과 늘 닿아 있다.
우리 가족의 이사 후에도 선미어머니는 종종 서울 우리집에 방문했다. 그리고 겨울방학이 되면 나를 그 집으로 데려가 한동안 지내게 하곤 했다.
그러나 초등 4-5학년이던가, 어느 겨울, 방학이 되고 늘 그렇듯이 선미어머니가 나를 데리러 서울로 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그 소식은 우리 가족들에게도 충격이었다.
나를 춘천으로 데려갈 때 함께 타던 기차에서 선미어머니가 사주시던, 삶은 계란을 먹던 순간이 오랫동안 나의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그것은 따뜻하고 달콤했던 기억이다.
그후, 선미어머니는 몇 해를 혼수상태로 병상에 누워지내다 끝내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나때문에 사고를 당한 것같아서 미안함과 죄책감같은 것이 마음속에 차오르기도 했으나, 그즈음 나는 아직 어려서 문병을 갈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어머니만 문병을 다녀오신 뒤로, 선미네 가족과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끊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때로부터 나의 머리속에서 풀려나가기 시작한 기억의 실타래 끝에는 선미와 그 다정한 선미어머니가 있다.
그렇게 내 유년의 한 시절에는, 제각각의 표정과 미소를 간직한 오래된 사진 속 빛바랜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이 서성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