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에 커다란 짐을 짊어진 타자가, 구회말 투아웃투스트라이크 상황에서 이제 딱 하나의 공만을 선택할 수 있다.
아니 선택이 아니다, 이제는 무조건 쳐야 하는 거지. 그냥 깩소리도 못하고 죽을 수는 없으니까.
공이 날아온다, 어쩐지 빛을 내뿜으며,
벌벌 떠는 타자의 방망이를 향해서.
B제약(주) 그곳은 2006년에 설립된, 어린이용 비타민제를 주로 생산하는 건강기능식품제조업체였다.
역시 드넓은 주차공간에 커다란 두어개의 건물이 넉넉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어쩐지 내눈에는 그토록 깨끗한 건물은 처음 보는 것처럼 광이 나는 듯했다.
생산직 면접에 생산부 부장이라는 여자분과 총무담당인 듯한 젊은 여과장이 나타났다.
뜻밖인 것은 P색조화장품회사의 면접 때 보았던, 함께 면접에 임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이곳 면접장에 나타난 것이다. 나보다도 그녀가 먼저 나를 알아보았다. 그녀 역시 화장품 회사의 지나치게 많은 야근스케줄에 질려서 아예 취업을 포기했다고 했다. 갑자기 동지가 생긴 것이다.
B제약(주)도 야근 얘기가 나왔다. 가끔 야근을 할 수있고 더 바쁠 때는 주말 특근도 있을 수 있는데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다. 어딜 가나 야근과 특근이 문제였다. 그러면서도 야근과 특근에 부담을 갖지는 않아도 된다며 조심스러워했다. 또한 장기적으로 근무할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나역시 간절히 바라는 바였으므로 그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하였다. 또한 당연히 정규직으로 채용되는 것이나 단 최초 2개월간은 수습기간으로 삼는다고 했다. 이 역시 조금 다니다가 힘들다며 쉽게 그만두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에 수습기간을 지나며 스스로 적응가능한지 가늠해보는 시간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습기간이 지나면 곧바로 정규직이 된다고 확인해 주었다.
정규직이 된다는 것, 2년이나 혹은 더 오랫동안 일해도 될지 말지 모르는 상황이 아닌, 2달의 수습기간 이후에는 곧바로 그렇게 된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뜻밖인 것은 보건증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이전에 더팩토리_D에서 일할때도 보건증 제출이 필수였기는 했으나, 그것을 위한 절차 등이 귀찮아서 가능하면 보건증이 필요없는 업종에서 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뒤늦게 알고보니 제약회사도 건강기능식품을 제조하기에 보건증을 제출해야 한다는 것.
일단 알았다고 하고 일하게 된다면 다음주 월요일 30일부터 하기로 합의를 보고 면접은 끝났다.
다음날 바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함께 면접을 본 여자아이(나보다 10년어린, 기혼녀)는 이전에도 건강기능식품 제조공장에서 무려 6년이나 일한 경력이 있어서 당연히 채용될 것 같았다. 내 경우는 생산직 경력이 있으나 나이를 문제 삼는다면 쉽지 않을 듯했으나 나이를 문제삼지는 않았기에 희망을 갖기로 했다. 반면 내가 문제를 삼을 일이 있다면 야근과 특근에관한 것이었다. 야근과 특근을 매우 중요하게 이야기했기에 그게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내심 우려되었으나 8:30~5:30까지 근무하고 집에서 가까우며, 정규직이 빠른 시일내에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마음이 쏠렸다.
면접이 끝나고 나는 곧바로 종합병원으로 갔다. 보건증을 위해서였다. 얼마전, 혹시 보건증이 필요한 곳에 취업을 할 경우를 대비해 유효기간이 지난 보건증을 재발급 받기위해 동네 보건소에서 새로 신체검사를 받았었다.
한데 뜻밖에도 3가지 검사항목모두 정상판정이아니었다! 그중 흉부엑스레이 결과에서양호판정이났다며, 쉽게 말해 폐결핵일지도 모르니까 큰병원에가서 제대로 진료를 받고 폐결핵이 아니라는 결과지를 가져와야 보건증을 내줄 수 있다는 얘기였다.
아, 나는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우울했고 착찹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게 이미 지난 4월의 일이었다.
3월초, 요양보호사 취업 대비용으로 신체검사를 하면서 건강검진을 했을때만 해도 정상판정을 받았었는데, 3월말 코로나에 확진되었다 나은후인 4월중순에 보건증을 위한 흉부엑스레이 검사에는 이토록 애매한 1차판정이 나온 것이다.
나는 마치 폐결핵환자인 듯한 심증에 스스로 절망감에 빠졌다. 그래서 이리저리 알아보니 어릴때 폐결핵을 앓앓거나 혹은 또다른 연유로 폐손상을 입은 경우, 이후에도 폐에 흔적이 남아서 비활동성폐결핵이라는 판정을 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활동성폐결핵은 실제 폐결핵균에 감염된 활동성폐결핵과 다른 것이고, 다만 정상이 아닌 '양호'상태로 보건증을 받아 식품회사 취업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는 착찹했다. 그래서 짜증이 났고 보건소의 충고를 무시하고 던져두었다가 그래도 혹시 만에하나 폐결핵이면 어쩌나하는 생각에 뒤늦게야 거리상 가깝고 가장 빨리 진료가 가능한 대학병원의 호흡기내과에 찾아가 진료를 받았었다. 엑스레이 촬영과 객담검사결과 폐결핵균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의사는 폐에 어떤 무리가 갔던 사실은 있는데 그것이 결핵균때문은 아닌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B제약(주)에 채용될 경우에 대비해 보건증을 서둘러 만들어야만 했다. 당장. 그래서 곧장 대학병원 호흡기내과 의사의 '폐결핵 아님'이라는 의미가 담긴 소견서를 받아다가 동네 보건소에서 보건증을 발급받았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양성판정과 그에 관한 소견이 기록되어있었다. 나는 사실 그렇게 깔끔하지 못한 보건증을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치 내게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언짢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연락해준다는 B제약(주)에서 실제로 채용되었다고 연락이 오면 보건증을 제출해야만 한다. 깔끔하지 못한 보건증을 받은 담당자 역시 나만큼 찝찝하고 불안할 것이 아닌가...그렇다면 그냥 취업의사를 포기해야만 할까. 하룻밤동안 나는 싱숭생숭한 상태로 어찌해야할까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다음날이 되고 오후쯤 전화가 왔다.
B제약(주)의 채용면접에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기뻤으나 동시에 심란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 사실대로 말하기로 결심했다.
나의 보건증에 이런 사연이 있는데, 아무 말없이 슬그머니 제출할 수도 있으나,
담당자가 나중에 알게 되면 의문을 갖거나 기분나쁠 수도 있고, 그로인해 뒤늦게 채용이 취소되기라도 한다면 모두에게 피해가 가는 것이니 처음부터 밝히기로 했다고.
그러자 그들에게도 이런경우가 처음이라며 자기들끼리 상의를 하고는 내 보건증과 그에 관련된 소견서 등의 서류를 보여달라고 했다. 나는 서류 사진을 송부했다.
잠시후 연락이 왔다.
_확인해 보니 취업해서 일하시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출근하시면 되겠어요. 그리고 그 점에 관해서 먼저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약 그와 관련해서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다녀야 한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면 상관없을 것같습니다.
_현재 저는 특별히 폐질환 치료를 받는 것도 없습니다. 입사하게 되면 매년 정기적으로 보건증을 갱신하기 앞서 폐결핵여부를 확인하는 검사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나를 믿고 채용해준 회사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로서 얼마든지, 1년에 한번 정도쯤은 폐결핵검사를 통해 나 스스로는 물론 그들을 안심시킬 생각도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투아웃투스트라이크 구회말 상황에서 나는 간신히 딱 하나,
마지막 공을 제대로 골라 쳐냈다.
이로써 n번째 나의 취업도전기는 끝난다.
5월 30일, 구비서류를 챙겨 첫출근을 시작했다.
채용이 결정된 다음날인 금요일, 하루 더 S&S화장품회사에 나가서 일했다. 마지막 알바를 하는 심정으로. 그리고 아웃소싱 담당자에게 통보했다.
나는 나이가 많아서 빠른 시일내에 정규직이 되어 보다 안정적으로 일하고 싶은데, 이곳에서는 그게 쉽지않은것같으니 여기서그만두겠다고.
첫 출근 날, 나는 함께 면접 보았던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녀 역시 당연히 채용된 것이다.
그곳에는 수년째 근무중인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1년 2년을 채우기 무섭게 새로 사람을 갈아채우기 바빴던 어느 사회적기업이 생각났다. 내가 바라던, 사실은 직업인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한 곳에서 오래 일하는 것이 가능한 곳!
면접당시 만났던 생산부장도 나와 같은 나이이며 10년 가까이 그곳에서 일하는 베테랑이었고, 나보다 4~5년 나이 많은 언니도 이미 5년째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