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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how Jul 08. 2023

어머니의 사투死鬪

_살 만큼 살았다,는 말의 경솔함

지금 한달째 입원중인 어머니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살 만큼 살았다, 라는 말처럼 경솔하고 무례한 표현이 없구나.



몇번을 다시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나는 6월5일, 소화기내과에 정기 진료를 받고 약을 받으러 갔다. 하루 연차를 내고.

그 전주에, 나는 허리통증을 늘 호소하는 어머니가 다시 한 번 진료를 받게할 생각으로 ㅇㅅ병원에 예약을 해둔상태였다. 예약은 6월말께로 잡혔다.


소화기내과 진료 순서를 기다리고 앉아 있을 때 요양원에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전날밤부터 열이 나고 오른쪽 갈비뼈 통증을 호소하신단다. 해열제를 먹여서 열은 내렸으나 아무래도 알려야 할 것같아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언니와 연락을 했고 구급차를 이용해 ㅇㅅ병원 응급실로 모셔야 할 것같다고 판단했다.

나의 정기진료가 끝나고 ㅇㅅ병원응급실로 달려갔을 때, 어머니를 실은 응급차가 도착했다.


그로부터 여러가지 검사가 이어졌다.

결과는 급성 담낭염이었다.

오른쪽 갈비뼈부근에 담낭이 있었고 그 부근이 이미 예전부터 아프다고 하셨던 것이다.


해가 지는 무렵이었고 나와 남편과 동생은 수화기 너머의 언니와 함께 응급수술여부를 결정해야만 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고령의 어머니에게 위험한 수술보다는 시술(담낭에 관을 꽂아 염증이 생긴 담즙을 빼내는)을 하기로 했다.

곧이어 입원이 결정되었고 다음날 시술을 했다는 소식이 왔으나, 결과는 나빴다.


그날은 6월7일이었고

내가 근무중 낙상사고로 손목골절 진단받은 날이다.


배를 갈라 염증이 생긴 담낭을 똑 떼어내면 간단할 일인데, 뱃가죽에 구멍을 뚫고 튜브를 넣어 담낭에 꽂으려할때 염증난 담즙이 새나오며 패혈증을 일으킨 것이다. 혈압이 오르지 않았고 염증수치는 수십 배로 치솟았으며 콩팥의 기능조차 떨어져 노폐물을 걸러내지 못해 혈액투석까지 해야할 상황에 이르렀다.

수술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우리의 치명적인 오류였을까...

그후로 특히 수술이 위험하다고 우겼던, 나는 깊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결국 패혈증성쇼크로 어머니는 긴급히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어머니 홀로 외로운 사투를 벌여야했다.

시간이 흐르자 의료진의  적극적이고 빠른 대처 덕분에 어머니는 조금씩 회복되었다.


보통 패혈증에 걸리면 사망절차에 들어간다는데, 어머니는 그것을 이겨내셨다.

의료진은 자신들의 노력이 성과를 거두었다며 자화자찬을 이어갔다.


우리가 보기에도 놀랍기는 했다.

의료진의 노력과 어머니의 생의 의지가 패혈증의 위기조차 극복해낸 것이다.

열흘 남짓한 중환자실 생활 끝에 투석의 필요성이 사라진 어머니는 다시 일반 병실로 이동했다.

물론 완전한 치유는 아니었다.

그곳에서도 어머니는 온갖 관이 몸에 연결된 채로 견디어내야 했다.


다시 일반병실로 면회를 갔을때, 어머니는 담즙을 빼내는 관이 연결된 주머니와 도뇨관이 연결된 소변주머니를 차고 있었으며 코에는 산소를 공급하는 콧줄 외에도 유동식을 급여하는 비위관까지 꽂혀있었다.

 

어머니는 거의 온몸이 줄에 연결된 채, 마치 마리오네뜨 인형처럼 스스로의 의지나 힘으로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렇게 다시 2~3주가 흘렀다.

면회는 매주 월/수/토 오후6~8시까지만 허용되는 간호간병 통합병동이었다.


간간이 의사는 퇴원후에 어디로 가야할지에 대해 조언했다.

담낭제거 수술을 당장 할 수는 없으나 나중에 체력이 회복되면 하도록 하자고 말했다가, 나중에는 그냥 관을 꽂은 채로 잘 관리하며  지내도 된다고 했다.

코로 유동식을 제공하는 비위관에 대해서도 의사는 앞으로도 그냥 관을 꽂은채 생활하는게 나을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


나를 비롯해 우리가족은 그것을 인정하기도 용납하기도 어려웠다.

틀림없이 어머니는 다시 입으로 음식 맛을 느끼며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고, 사는 동안에는 그러해야만 하리라고 생각되었다.

더구나, 비위관이나 산소 콧줄을 잡아뺄 우려가 있다는 소견으로 환자의 양손목을 침대 난간에 결박하여 묶어둔 상태를 나는, 나의 어머니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는 말했다.

엄마 콧줄을 제거하고 입으로 식사를 하게되면 손목 결박도 풀어줄테니 그렇게 하도록 하자.

그래, 그러자.

엄마도 동의했다.

나는 그런 뜻을 의사에게 전달했다.

의사는 정 원한다면, 삼키는 기능이 회복되도록 연습을 먼저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또한 입으로 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혹여 물이나 음식물이 기도로 넘어가면 흡인성폐렴에 걸릴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어머니는 백발백중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나는 긴장되었으나 그런 연습을 돕기 위해 며칠만이라도 어머니 곁에 상주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의사는 나의 요청을 받아들여주었다.

그로써 나는 6/27~7/4까지 상주보호자로서 24시간 어머니 침상 옆에 머무르며 삼킴연습을 돕기 시작했다.

상주 2~3일만에 어머니의 코에서 비위관이 제거되었다.

숟가락으로 물을 조금씩 흘려 넣어주며 사레가 들리지 않도록 애쓰며 삼킴기능이 회복되도록 애썼다.

다음으로는 입으로 유동식을 먹게 했다. 아주 천천히 먹어야 했고 그역시 사레를 조심해야 했다.  

나중에는 연하곤란 환자를 위한 미음 먹기를 시도했다.

물처럼 묽은 액체는 오히려 흡인 우려가 크지만, 환자맞춤 '연하곤란食' 되직한 풀같은 점성이 있는 고운입자로 되어 있었다.

뜻밖에도 그것을 몇 숟가락 떠먹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맛이 없다며 먹지 않으려는 환자에게 강제로 먹일 수도 없어서 나는 조금씩 낙담했다.

어머니는 콧줄의 괴로움은 다 잊은 듯, 맛이 없고 먹기 싫다는 소리만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간신히 조금 삼키고 난 뒤에도 문제였다.


일반적으로 과식을 하거나 했을 때 속이 부대끼는 것처럼, 어머니는 목구멍을 넘어간 미음을 소화시키는 일이 몹시 힘겨워보였다. 혈압이 오르고 숨이 가빠지는가 하면 산소포화도까지 떨어져 평소와 달리 고용량 산소투여기까지 필요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사실 콧줄은 위장에 바로 음식물을 도달시키고 입으로 먹게되면 식도를 통과하여 위장으로 가게되니 소화의 문제는 아닐지도 몰랐다. 불편한 비위관이 목구멍에 걸쳐져 있는동안 자극이 되었던 탓에 오랜만에 유동식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것이 오히려 더욱 자극이 되고 불편해진것일지도 몰랐다.


그러한 상황을 지켜본 의사는 물을 드실때 사레가 걸린 적은 없는지 물었다.

물을 아주 조금씩 흘려넣어 삼키게 했음에도 한두 번은 사레가 걸린 듯 켁켁거리는 소리를 내곤 했음을 나는 실토해야만 했다. 

그러자 의사가 다시 결정을 내렸다.

비위관 다시 삽입하겠습니다. 현재, 어머니께서 입으로 식사하는게 무리인 듯하니, 억지로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나는 또다시 낙담했다.

나는 틀림없이 콧줄_비위관만 제거되면 어머니가 우걱우걱 맛나게 식사를 하시기를, 틀림없이 잘 하실 수 있을 것으로 믿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어머니는 본인 스스로 씹어삼키는 식사에 대한 의지가 박약해보였다.


다시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비위관을 꽂게 된 어머니 곁에서 더이상 내가 할일은 없었다.

모든 간호간병은 간호사와 조무사들이 하기에, 나는 7/1일에 집으로 돌아왔다.


오른손도 부자유스러운 나의 자발적 의사였음에도 어머니 침상곁에서 잠시 머물게 되었을 때,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은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의 근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나로서는 어머니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한 시도해 볼 도리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의 급성담낭염으로 인한 입원이 6월5일, 나의 손목골절사고가 6월7일...

그전부터도 그런 생각이 희미하게 들기는 했으나, 어쩌면 어머니와 나는 보이지 않는 시간의 끈으로 다른 자녀들과는 다르게 조금 더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다.


어머니의 입원으로 인해 어떤 식으로는 돌봄을 위한  시간이 필요해지는 때,

하필 내가 산재를 당하여 뜻밖에도 몇달간의 휴지기를 갖게 된 것은,

쉽게 설명하기 어려우면서도 막연히,

어쩌면 그러하리라고 그저 그렇게 고개 끄덕이게 되는 과 연이 아닌가 말이다.


입원 한달을 넘어가는 이제 어머니는 산소공급용 콧줄도 떼고, 소변 배출을 위한 도뇨관도 제거하여 퇴원을 위한 과정에 들어섰다. 다만 식사는 여전히 비위관으로 유지하고 있을 뿐.

내일모레 퇴원 후에는 당분간 다른 요양병원으로 옮기게 될 것인데, 어쩌면 콧줄을 빼고 예전처럼 입으로 식사를 하는 연습을 할 수 있을지를 가늠해볼 생각이나 의사는 결코 권하지 않는다.

또한 입원사유였던 담낭에 연결된 관은 현재로서는 그대로 유지관리하며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입원과 패혈증쇼크와 회복과정을 보며, 누구에게도 함부로 살만큼 살았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셔도 좋으련만,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전에 나는, 어머니처럼 80~90세를 넘기며 골골하며 생을 이어가며 하릴없이 자식들에게 부담이 되는 고령의 어르신들을 보면, 살만큼 사셨는데...하는 경솔한 생각을 너무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한 듯 해왔던게 사실이다.


내 어머니의 경우에도, 구십 세를 넘겼으니 충분히 살만큼 사셨다, 생각했었으나, 이번 사투를 지켜보며 어머니의 생의 의지가 얼마나 절박하고 강한지 새삼 깨달은 것이다.


마리오네뜨처럼 온갖 줄에 연결된 상태에서도 어머니는 비몽사몽중 아이고...아파죽겠네...살려줘, 라고 뇌까리곤 하셨다.

평상시 대부분의 경우, 이렇게 사는 것은 의미없으니 빨리 죽어야 된다는 말씀을 습관처럼 되뇌이곤 했으나 생사의 경계에서 사투를 벌이는 순간에는 누구도 가늠할 수 없고 꺾을 수 없는 강렬한 삶의 의지가 폭발적으로 살아나신 듯하다.


어머니의 사투를 지켜본 나는 마침내,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한들 살만큼 살았다,라는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만, 사는 동안
당신의 하루하루가 고통 없고
평안한 나날들이기를
바라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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