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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how Apr 18. 2024

어쩌다, 쓰리잡Three Jobs

_5년차 월급생활자로서의 삶을 정산하다  

2019년을 일주일여 앞둔 어느 추운 겨울날,  월급생활자로서의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몇개의 아르바이트를 거쳐 2019년 4월 15일 초콜릿생산공장 더팩토리 D에 정식으로 취업하는것을 시작으로....가만 있어보자....마침, 달력을 확인하자니, 어느새 5년을 넘기고 있다.

그 5년여의 시간이 흐르는동안 나는 초보 생산직 근로자로서 이리뛰고 저리뛰며, 난생 처음 생산현장의 현실과 전망에 대해 생생히 경험하였다.

그리고 오늘 현재, 지나간 급여명세를 정산하다보니 어쩌다 내가 쓰리잡을 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발견...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일은 분명 새로운 발견과 같다.


그리고 5년여 월급생활자로서의 시간을 정산하며, 능력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쓰리잡을 갖게 되었는지 되새겨보기 시작했다.



1995년즈음부터 시작된 글쓰기...그 일은 생산직에 들어서면서 명목상으로는 분명히 집어치웠다.

그럼에도 글쓰기란, 어느새 밥먹기처럼 일상의 작은 습관처럼 잔뿌리가 내려버린 상황이었기에 브런치에  글쓰는 일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생산직노동자로서의 희노애락에 대하여 브런치북 가장열렬한 하루 에 기록하기를 이어갔다.

그후, 이미 나와 함께 우리말 책을 몇권 출간했던 출판사대표님의 권유로 2~3년전에는 새로운 우리말책 출간계약을 맺었다. 대표님은 내가 월급생활자임을 알기에 원고넘기는 기간에 한계를 두지 않았다. 내가 틈틈이 원고를 써서 다 되는 때, 그게 언제가 됐든 그때 출간할테니 시간에 구애받지 말라고 배려를 해주셨다. 

그 시간이 이제까지 흘렀고 나는 그 약속을 지키기위해 정말로 틈틈이 원고를 만들었다.

마침내 초고가 완성되었으며 그것은 이제 몇번의 퇴고를 거쳐 출판사로 넘길 예정이다.


나는 글쓰기를 집어치우고 근로현장으로 나섰으나
끝내 글쓰기를 완전히 그만두지는 못했다. 어쩌면, 조금은 고단하고
 지칠 때마다 조금은 무겁고 쓸쓸한 걸음으로 이곳에 돌아와
글쓰는 행위를 이어감으로써,
월급생활자로서의 삶조차 이제까지 이어나갈 수 있는 작은 동력이 되어준것같다.
그로써, 나는 그만 글쓰는 일을 그만두겠다거나 더이상 글따위 쓰지 않겠다는
투정섞인 맹세는 하지 않기로 했다. 글쓰기는 어느새
내 인생의 절대적인 필요근육이 되었다. 어느새 그것은
수의적,혹은 불수의적 근육과 같다.
돈이 되든 아니든 그래서 글쓰기는 나의 첫번째 직업임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처럼 월급생활자로서, 적잖이 까탈스런 생짜배기 생산직노동자로서, 수많은 생산현장에 취업을 시도하며 면접을 보는 와중에도 사회복지와 요양보호사 자격을 취득하며, 정말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과정이 5년내내 이어졌다.

그러던중, 지난 5월초에 입사했던 빵공장에서 한달만에 손목골절상을 당해 4개월여의 산업재해휴업수당을 받으며 놀고 먹게 되었다. 말이 좋아 '놀고 먹는'것일뿐 한여름 폭염의 한복판에서 오른쪽 손부터 팔꿈치까지 깁스를 하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정말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도 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이다.

아무리 월급여에 버금가는 휴업수당을 받아도 그것은 썩 유쾌하지 않은 일임에 틀림없었다.

어쨌든, 그즈음 나는 우연히 보험설계사 시험을 보게되었다.

2~3주 정도 공부하고 생명보험판매자격시험을 치렀고 합격했다. 그러자 새로운 고민이 생겨났다.

보험설계사 일을 해볼까. 나를 끌어들인 사람이, 그 일을 하게 되면 받게될 엄청난 수익에 대해 떠벌리는 것에 혹해서, 순전히 그사람의 이익을 위해 던진 달콤해보이는 미끼를 덥석 물어버린 풋내기 올챙이였던 나는, 그럼에도 일단 그 세계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10월, 깁스를 풀고 재활을 거쳐 빵공장에 돌아갔다가 3일만에 뛰쳐나와 보험설계사들이 드글거리는 사무실로 한동안 출근했었다.

그리고 가족, 친척에게 몇건의 보험을 판매했고 손해보험판매자격시험에도 응시하여 합격했다.

결론적으로....나는 현재까지도 보험설계사 자격이 있으며 그 사무실의 명부에 등재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열심히 보험상품을 판매하지 않는다. 그 세계에 발을 들이고보니 정작 보험회사만의 이익이 보장되도록 갖추어진 보험판매업의 실상만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내가 알게된 그 세계의 불공정한 게임의 룰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가입자가 가입을 한뒤, 일정시간 이후의 어느시점에 도달하기전에 해약을 하게되면 그때까지 납입한 보험료를 돌려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설계사는 그보험가입으로인해 받았던 수수료와 시책비(성과급이라고 하면 될까)등을 몽땅 토해내야 한다. 즉, 환수를 당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완전판매를 이루어야한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늘 변화가능을 내포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험업은 앞으로 남고 뒤로 막는다'는 소리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고, 설계사들 중에는 그와같은 '환수제도 때문에 집을 날린 사람도 있다'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듣기도 했다.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 보험가입을 적극 권유해도 그 보험이 최소한 2년이상 유지되지 않으면 가입자나 설계사모두 적지않은 금전적 피해를 입는것이다.


그렇다면, 보험회사는? 아무런 피해도 손해도 없다.


자신들이 만든 원칙에 의해, 죄다 돌려주지 않고 돌려받고 하기 때문에...

물론, 보험이란, 잘 유지하기만 한다면 가입자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때 도움이 되어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고 보험금이 뭉텅뭉텅 지급되더라도 보험회사들이 하나같이 높은 빌딩을 쌓아올릴 수 있을만큼 그들에게는 결코 손해가 아닌, 언제나 남는 장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보험설계라는 일은 도박과 닮아 있다.

보험가입을 많이 시키면 엄청난 수당을 받을 수 있다. 한달에 수천 만 원, 때로는 억단위 수입을 올리는 설계사들이 실제로 있다. 그러나 그후로는 환수를 당하는 일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결국 내 고객이 보험해약을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야 하는 것이다...


결국, 나는 그러한 도박과도 같은 일에
염증을 느꼈고 빠르게 흥미를 잃었다.
 
내가 월급생활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내 자신 성실하게 땀흘려
노력한 만큼에 상응하는 대가만을 바랐기 때문이다.


결국, 그로써 그럼에도 주위의 누군가 생명보험이든 손해보험이든 필요하니 설계를 해달라고 하면 도움을 주기로 했다. 그리고 가입을 하면 고맙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식으로 부담없는 보험설계사FP라는 명함을 갖게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10월부터 12월정도까지 보험사무실에서 일해 보다가 다시 생산직근로현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보험설계사는 특수고용형태 근로자로서 각 설계사가 개인 사업자로 인정된다.

그렇기에 그 직을 유지한 상태에서도 다른  생산직현장에 취업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새로이 몇가지 업종에 도전했다. 그러나 결국 모두 그만두고 말았다.

그즈음은 2월 초,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시점과 맞물린다. 지난해부터 돌아가시기까지 1년여의 시간동안 어머니의 급작스러운 병환과 그로인한 상태 변화 시간 가운데는 요양원도 있다. 1년의 시간 중 어머니가 요양원에 계신 시간만 총 8개월 남짓된다.

그 기간, 나는 주1~2회정도 어머니를 만나러 요양원을 드나들었고 나의 어머니를 돌보는 요양보호사들을 조금더 가까이, 조금더 많이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2월 즈음, 나는 불현듯 요양보호사의 일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허나, 내 어머니도 돌보지 못했으면서 남의 부모님을 어떻게 돌볼 수 있을까, 그것이 가장 큰 딜레마였다. 생각하고 생각했다...결국 나는 그요양원 대표에게 취업의사를 밝혔다.

대표님은 고민끝에 자격증만 있는 나, 신출내기 요양보호사를 채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제 겨우 두달이 넘어간다.

현재 나는 새로운 직업, 요양보호_월급생활자로서의 삶을 세번째 업으로 시작했다.

요양원 요양보호사로서의 일은 단순히 돈을 바라고 해서는 안되는 일임을 하루하루가 갈수록 깨닫게 된다.

그 일은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존중과 공감, 나아가 소명의식까지 필요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제 갓 시작한 초보 요양보호사로서
얼마나 소명의식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나, 나는 다만 한없이
나약한 한 인간이
생의 마지막을 향해 저물어가는 시간을,
내가 조금더 따뜻하게 어루만져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만 겨우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어쩌다보니 현재 나는 쓰리잡을 뛰는, 언뜻 누가 들으면 '참 유능하신 분!'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고정적인 수입이라면, 요양보호사로서 일하고 받는 급여이며, 그외 글쓰기보험설계사로서의 수입은 부정기적이고 예측하기 어렵기에 결코 유능하다고는 할 수가 없어보인다.

글쓰는 일은 책을 낼 때나 수입이 발생하고 보험설계 역시 누군가 고맙게도 내게 보험을 가입해주어야 그나마의 수입이라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쓰리잡을 유지해보려는 의도는, 나이가 점점 들고 은퇴기가 가까워지는 시간을 지나다보니 조금이라도 더 경제활동이 가능한 만큼 풀가동을 해보자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하는데까지 해보자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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