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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how Mar 17. 2024

또 한번의 비보悲報

20240219세상을 떠난 나의 스승_故박영부선생님을 추모하며

나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3일 뒤에는 어머니를 기리는 소나무가 있는 수목장 묘원으로 삼우재를 다녀왔다. 그리고 나는 동생이 곧 제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어머니가 생전에 아끼고 모아둔 수많은 물건과 귀중품들과 옷가지들을 함께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 어느날, 정확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지 꼭 열흘만인 20240219 오전 9시무렵

나는 뜻밖의 카톡메시지를 받았다.  


그것은 나의 중학교3학년때 담임이셨던 박영부선생님의 부고訃告였다.


국어과목을 담당하셨고 중3때 담임이셨던 그 분을 나는 매우 존경한다. 학교다닐 때, 선생님은 매우 인기가 좋은 분이셨다. 여중에서 남자선생님은 당연 인기 우선순위기도 하지만, 지금 헤아려보니 당시 선생님은 30대초반의 젊고 멋지고 카리스마 넘치는 분이었다. 그 시절 그 선생님을 좋아했던 나는, 덕분에 국어공부에 대단히 흥미를 갖게되었으며 훗날 내가 국어교육이라는 전공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절대적인 영향이 있었음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심지어 중학교 졸업후 무려 30여년이 지난 뒤에야 다시 학교로 선생님을 찾아가 뵙고 밥 한끼를 함께 하고 돌아오며 나는 그전까지는 미처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뜨거운 사막위의 하찮은 모래알처럼 바람이 불때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던 철부지 시절, 아무리 밤과 낮이 바뀌어도 여전히 지루하고 하루하루 부질없게만 느껴지던 무위의 청춘을 그저 지치도록 소진하던 동안에도 나는, 얼덜결에 글쓰기를 시작하고 등단을 하고, 또 어떤 계기로 어린이용 우리말 책을 쓰고 세상에 내놓으며 어줍잖은 작가나부랭이가 되었어도, 그 모든 시간의 좌표 가운데 점철點綴되어 있었음에도 스스로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그 사실.

나는 그로부터 틀림없이 내인생의 주로에 단단히 붙박혀있 당신이라는 이정표를, 거기 뽀얗게 뒤덮여있던 먼지를 문질러 닦아내며 고백했다.


선생님이 제 인생의 이정표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나는 맨처음 출간했던 우리말책을 선생님께 헌정獻呈하며 주저없이 고백했다.


어쩌면 인생은 늘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한참동안 이리저리 방황하며 정처없이 떠돌았다 생각하며 문득 돌아보면, 결국은 그 자신의 부지불식간 무의식적인 생의 이정표를 따라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나는 참 수줍고 어리석었다.

수줍고 내성적이며 심약한 내가 마음속으로 그토록 열렬히도 중학시절 사모했던 스승님을 다시 찾아뵐 때까지 자그마치 30여년이 걸렸다는 사실이 그 명명백백한 증거가 아닌가.

내가 3년동안 다녔던 그 여중은 서울 한동네 여전히 자리잡고 있음에도, 그 부근을 적어도 수백 번은 지나다녔음에도, 불현듯 당신을 찾아가 인사드릴 용기를 내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러다 95년에 어떤 문학상으로 등단을 하고 글쓰기를 시작하고, 2001년에 결혼을 하고, 본격적으로 내 이름이 박힌_필명일지언정_책들이 하나둘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나는 그토록 열렬히 사모했던 그 여중시절 스승님을 꼭 한번 찾아뵈어야할 것만 같은 숙제를 갖게 되었다.

꼭 한번은 찾아 뵙고, 당신 덕분에 나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만 할 것같았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어느날 남편과 함께 다시 나의 옛 중학교를 찾아갔다.


늘 그자리에 있던 그 학교, 늘 한곳에서 묵묵하게 평교사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고 계시는 선생님을 나는 30여년만에 마침내 다시 만났다. 그렇게 쉽고 간단한 일을 왜 그토록 오래 미루었을까 후회하며.

그때부터 나는 다시 선생님과 연락을 이어갔다...그로부터 다시 20여년이 이렇게 지났다.

그후 얼마뒤 선생님은 정년퇴직을 하셨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오래 살던 동네_상도동의 재개발건과 관련되어 어쩔 수없이 삶의 터전을 마포쪽으로 옮기셨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후 나는 어느날 와인 한 병을 사들고 선생님댁을 방문하여 사모님도 뵙고 몇시간 담소를 나누고 돌아왔다...그뒤로도 가끔 메일을 주고받았고 내가 쓴 책이 출간되거나 남편의 좋은 번역서가 나올 때면 잊지 않고 종종 보내드리기도 하였는데, 그때마다 선생님은 곧바로 전화를 걸어서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전해주시며 서로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나누곤 했다.


그렇게 선생님과 나는 가끔 안부를 물으며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 젊으시니, 앞으로도 더 오랫동안 그렇게 잊은듯 지내다가 반갑게 안부를 묻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다고 착각했다.

그렇기에 코로나시절에도 잘 지내시리라 생각하고, 내가 글쓰기를 집어치우고 생산직의 세계에 뛰어든 일에 대해서는 차마 이야기하지 못한채,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만 했다.


왠지, 나의 어머니만큼이나 그런 선택에 대해 서글퍼하실까봐 근심되었기에.



그러던중, 급격히 노쇠해진 어머니의 병원진료와 입퇴원의 반복과 요양원입퇴소 등등의 다난했던 지난해, 불안하고 위태롭던 시간의 말미에 어머니가 끝내 세상을 떠나시고 불과 열흘이 지난 어느날 불쑥, 선생님의 부고를 전해들은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뿔사, 내가 어머니의 시름에 정신을 쏟는 동안 한편에서는 선생님께서도 그렇게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계셨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 사이 내가 한번이라도 안부를 여쭈었더라면, 한 번이라도 문병이라도 갈 수 있었더라면....

열흘 사이에, 나를 세상에서 가장 열렬하게 아낌없이 응원해주시던 또 한 분을 잃었다는 사실이 마음아팠다.

그 마지막을 함께 할 수는 없었을지라도 선생님의 쾌유를 위한 기도의 시간을 가질 수는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 그러지 못한 나의 불찰이 못내 아쉬웠다.


그럼에도 나는 한달음에 빈소를 찾아가지 못했다.

어머니 상을 당한지 열흘밖에 되지 않은 상주로서, 다른 상가에 가는 것은 서로 꺼리는 일이라는 언니의 조언에 의한 것이었다. 나는 고민했다...그래도 가봐야 하지 않을까...결국, 나는 부의만 전하기로 하고, 부고를 전해준 선생님의 둘째 아드님과 몇 차례의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향년 81세이신 선생님 마지막 시간과 관련하여 안타까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님께서는 지난 6년동안 호흡기내과 심장내과 당뇨내분기과 신장내과 심장내과 협진중이셨고요.  18년겨울부터 세브란스에서 진료과가 하나씩 늘어나긴했습니다. 그래도 6년간 제가 모시고 진료함께해서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긴합니다.건강이 전해질균형이라 매년겨울 한번씩 응급실을 다녀오긴했지만 그래도 활력도 좋으셨습니다.
중간에 담도담관(담석)때문에 ercp 역행담도담관내시경을 잘이겨내시기도했고요. 이번 겨울에는 왼쪽 갈비아래통증이 한번있고 바로 다음날 혈변보시고 바로 응급실모시고갔는데 대장암 2기가 되어 수술하셨는데 당뇨때문인지 문합후 회복이 더뎌 결국 2차수술하시고 금식이 한달까지 이어져 활력이 떨어지게되고 그동안 균형맞춰놓았던 5개 진료영역이 한번에 무너져서 중환자실가서 간신히 회복되어 일반실까지 회복되시던차에 가장 좋은 컨디션인 날 저녁10시 심정지로 돌아가셨습니다.
코로나가 뭔지 가족면회도 힘들다보니 한달간 저만 간병하다가 돌아가시기 3일전부터 어머님이 교대간병하면서 더 많이 좋아지셨는데 갑자기 그렇게 돌아가실줄은 몰랐습니다. 가족도 의료진도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둘째 아드님이 전해준 메시지 일부)


나는 차라리 내 어머니처럼 한 달이든 일 주일이든 앓으시다가 돌아가셨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차라리, 어머니가 서서히 생의 마지막 시간을 향해 가는 동안 가장 옆에서 가장 가까이 지켜보고 어루만지며 마음으로부터 어머니와의 이별을 준비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머니와의 이별은 안타깝지만 그로 인한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결국 누구나 한번은 영영 이별하는 법이니...어머니가 다만 고통에서 자유로워지시기를 바라는 심정이었기에.


하지만, 선생님은 원래 여러가지 지병을 앓으시는 동안에도 잘 관리받으시다가 내 어머니보다 10년이나 젊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뜻밖에 발견된 대장암으로 인해, 힘겨운 수술과정을 이겨내시고 회복기에 들어서 가장 상태 좋은 날 밤 돌연 심정지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러니, 틀림없이 회복되리라 기대하던 중에 갑작스레 남편을, 아버지를 잃은 가족들은 얼마나 충격이 클것인가...황망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내가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다만, 비슷한 시기에 어머니를 잃은 자식의 심정으로서 준비없이 아버지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가족들께 그저 성심껏 위로의 마음을 전할 뿐이었다.


선생님은 가셨지만, 당신은 여전히, 내마음 속에 나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살아계실 것이다.

내 어머니가 수목장_소나무아래 계시듯, 선생님은 또한 잔디장을 원하셨고 그 파란 잔디밭에 잠들어 계신다는 이야기도 전해들으며 나는 어쩐지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나의 가장 소중했던 두 어르신 모두 자연으로 완전히 돌아가시기를, 세상에서의 모든 번뇌와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시간만이 물처럼 흘러가기를 소망하게 되었다.


부고를 듣고도 부득이 빈소를 찾지못했던 나는, 앞으로 좀더 날이 풀리면 선생님이 계신 잔디장 묘역으로 찾아가 늦은 작별인사일지언정 꼭 드리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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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신지도 어느덧 한달여가 되어간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응원군이던 어머니와 스승님을 마음에 간직하고 다시 새로운 걸음을 내딛으려 한다.

인생은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이다...살아갈수록 점점 그 말의 의미를 깨닫게된다.

그럼에도 지치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것은 내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가시밭길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동안, 나는 그저 묵묵히 살아갈 것이다.




                                             ●



삼가, 고박영부선생님의 명복冥福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故박영부선생님의 생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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