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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how Apr 24. 2017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신실한 삶을 살다 가신 데레사 할머니를 기억하며..

이글은 이제로부터 7년전(2009년) 즈음 쓴 글이다. 

어느새 아득하기도하고 어제같기도 한 그 무렵의 어떤 인연,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지금도 가끔 그분이 생각난다.




지난해 2008년, 1월이었다.

내가 처음 성당의 레지오 주회(晝會) 모임에 참가했던 어느날, 회합이 끝났을때  머리가 거의 백발이신 할머니 한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오셔서 반가운듯 물으셨다.

'본(本)이 어디요?'

할머니는 내 이름을 듣고 같은 성씨라는 사실이 무척 반가우신 모양이었다.

그렇게 나는 데레사 할머니를 처음 만났다.


할머니는 86세의 나이에도(성당에서 집까지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는데도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는 외에도)성당까지 종종 걸어서 다니신다고 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매일 묵주기도를 50단씩 한다고 말씀하셨다. 일주일에 한번 레지오 주회에서 자신이 일주일간 참례한 미사와 묵주기도 횟수를 보고하는 시간이 있는데 그때마다 할머니는 어김없이 350단씩 성실하게 보고하셨다.

기운넘치는 젊들도 하루에 5단씩, 일주일에 35단 하기도 쉽지 않았는데 내 나이보다 두배나 많으신 할머니는 매일 50단씩 묵주기도를 바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할머니는 늘 미안하다고 하셨다.

'나는 늙어서 다른 활동은 아무것도 못했시유....그냥 묵주기도만 350단 했시유...'하고 얌전히 말씀하셨다.

 

그때마다 나는 생각했고 지금도 종종 생각해본다. 나도 그 나이가 되면 할머니처럼 열심히  성모님께 기도를 바칠 수 있을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없다. 기도를 열심히 할 자신도 미사에 더 열심히 참례할 자신도...

레지오 주회가 다가올 때면 밀린 기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미뤄둔 숙제같아서 곤혹스러운 순간이 자주 있다. 그럼에도 게으름은 여전하다. 때로는 사악한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적어도 일주일에 35단은 기도 숙제를 해야하는데 하지 못했을 때....그냥 한 50단 했다고 말해버림 안될까....그런데 차마 그런 짓은 못하겠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었다.


명색이 신앙을 가졌고 제발로 걸어서 레지오에 들어간 마당에 묵주기도 횟수를 거짓으로 고하는건 정말 말도 안될 뿐 아니라, 그런 생각을 잠깐이라도 한다는 내 자신이 한심하고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조차도 죄를 짓는 것과 같아보였다. 그래서 다른 단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도 기도횟수를 조작하는 일은 꿈꾸 않는다.

그러니 더욱 데레사 할머니의 주간 기도횟수가 늘 경이롭고 존경스러울 뿐이었다.

 

할머니에게 있어 천주교는 모태신앙이었으며 지금까지 줄곧, 오로지 앞으로만 나아갈 줄 아는 우직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86년이 되도록 이어져 왔다. 그러나 할머니에게도 아픔은 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슬하에 7남매를 두셨는데 어찌된 일인지 모두들 냉담자였던 것이다.

할머니의 소원은 죽을때까지 레지오 활동을 하시다가 레지오단원으로서 선종하고 그와 더불어 가능하면 죽기전에 자식들도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할머니가, 지난 여름부터는 걷는 것도 예전만큼 활발하지 않고 종종 넘어져서 얼굴에 찰과상을 입거나 한두 번인가는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하시느라 몇 주씩 주회에 빠지기도 하셨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몸이 회복될 때면 다시 레지오 주회에 나오셔서 그동안 보고하지 못한 기도 횟수를 모두 헤아려 보고하셨다.


언젠가 7주 정도 후에 나오셔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묵주기도 2340단....'

할머니는 몸이 아파서 병원에 누워계실 때도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고 기도를 이어가셨던 것이다. 그분께 기도는 이미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밥을 먹는 일과 마찬가지로 하루하루 중요한 일과였던 것이다.

그런, 기도대장 할머니가 얼마전 하늘나라로 가셨다.




내가 두어 주 주회를 빠졌다가 다시 나갔을 때, 할머니는 얼마전부터 건강이 매우 안 좋아져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는 것이다. 사람도 못알아보고 헛소리도 하신다고한다.

몇몇 단원들은 이미 문병을 다녀왔는데 이번에는 돌아가실 것같다는 말도 나왔다.


그리고 2008년 11월 16일 일요일 오전 10시에 데레사 할머니가 선종하셨다는 기별을 그 가족이 우리에게 알려왔다.

지금까지 나는 몇몇 가까운 분들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와 이모와 이모부. 그분들은 모두 나와 피를 나눈 피붙이일뿐 아니라 매우 가까운 분들이시다.

반면, 이번에 죽음을 맞이한 데레사 할머니는 어쩌면 나와 상관없는 그저 이웃노인에 불과한 존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뜻밖의 인연으로 나는 할머니와 레지오에서 10개월여를 함께 활동하게되었다. 맨처음 만났을때 낯선 나를 향해 자상하게 웃으시며 말을 걸어주신 외할머니같으신 분이다.


그럼에도 그분의 신앙의 깊이와 넓이를 도저히 가늠할 수도, 흉내낼 수도 없는 나는 그 분의 선종이 왠지 아쉽게 느껴진다.

더 많이 앓지 않으시고 입원한지 보름여만에 돌아가셨다니 불행중 다행으로 편히 잘 돌아가셨다고 위안을 삼으면서도 그렇다.


선종소식을 들은 날 다른 단원들과  나는 빈소가 마련된 명동성당으로 함께 갔다.

다함께 연도를 바치진심으로 할머니가 편히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바랐다.

 

자리가 끝날즈음, 홀로 남게된 할아버지가 보였다.

머리가 백발이며 60년 가까이 함께 살아온 아내를 먼저 보낸 남편으로 홀로 서있는 할아버지의 얼굴은 초췌하고 시들어보였다.

그전까지 담담한 심정이던 나는 그만 쓸쓸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리 자식이 많아도 두 분이 의지하고 사셨으니 할아버지의 공허감은 더욱 클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의 선종이 아주 슬프기만 한 일은 아닐 것이라고 위안을 삼는다.

모두 냉담자였던 자녀들이 할머니의 선종을 계기로 고해성사를 하고 하느님께 돌아왔다고 하니까...




 알의 밀알이 떨어져 썩어야 새 싹이 난다는 말이 있둣이 유데레사 할머니의 선종은 자식들에게 한알의 밀알과 같은 의미가 있었음에 틀링없다.

 

나는 아직 열심한 신자도 아니고 믿음에 대해서도 자꾸만 회의하며 나 자신에 대해서도 의심이 끊이지 않는 쭉정이에 불과하다. 기도하는 흉내나 내고 신자인척 연기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데레사 할머니의 생전의 모습이나 선종 뒤의 밀알과도 같은 생애에서 진정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곤 한다.



 .....우연히 천주교신자의 인연으로 만나 잠시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한마음으로 기도하던 그해 몇개월, 그리고 데레사할머니의 선종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해질 무렵 고요한 햇빛으로 잔잔하게 반짝이는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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