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로이트-인천 항로에서 그를 만나다!
꿈결이었다 말할 수 있을까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열흘 간의 미국 여행을 마치고 디트로이트 공항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처음 미국을 방문했던 2015년 9월 이후로 2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총 세 번의 미국 여행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모두 미시간에 살고 있는 친구 덕분이었다.
12시간 50분에 달하는 비행시간의 길이에 다시 한번 도전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다섯 차례에 걸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항공사에서 제공하는 영화도 여러 가지로 준비되어 있었고 중간중간 적절한 잠테크를 발휘하면 이 긴 시간도 제법 잘 견딜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지나온 열흘 간의 여행길을 더듬어 보았다. 꿈결이었다 말할 수 있을까.
동부 두 번과 서부 한 번 총 세 번의 미국 여행을 하면서 마치 '공간이동'을 하는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비행기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그 안에서 13시간만 버티면 나는 전혀 다른 세계로 던져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는 것이었다. 마치 내가 살고 있었던 일본이나 한국이라는 공간과 비행기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공간이동한 미국이라는 곳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닌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우연한 재회
나는 원래 복도 편 좌석을 배정받았었다. 내 오른쪽 좌석에는 1~2살로 보이는 아기가 눞여져 있었고 그 오른쪽으로 아기의 엄마로 보이는 젊은 여인이 앉아 있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가 한쪽을 다시 벗으면서 아기의 엄마로 보이는 옆좌석 여인에게 말을 건넸다.
" 저, 혹시 옆으로 나가야 할 일이 생기시면 그냥 편하게 나가세요. 제가 잠들어 있어도 그냥 깨우고 편히 나가시면 됩니다. ^^ "
" 아, 네! 감사합니다. ^^ "
젊은 아기 엄마는 내가 갑자기 말을 걸어와서인지 조금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웃으며 감사를 표현했다.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앞좌석 뒤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보고 싶은 영화 목록을 이리저리 찾았다. 그런데 잠시 후에 아기 엄마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 저, 혹시.. 뒷자리에 저희 엄마가 타고 계신데 죄송하지만 자리를 좀 바꿔 주실 수 있을까요? "
나는 뒷좌석으로 시선을 돌렸고 몇몇 사람들과 눈을 마주쳤다. 한 젊은 남자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의 남편이었다. 남편이 내게 자기와 자리를 바꿔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내는 그 자리는 창가 쪽이라 불편할 거라고 말하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 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자리를 바꿔 드릴게요. ^^ 어머니와 자리를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남편보다는 어머니가 옆에 계신 편이 아기 보시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ㅎㅎㅎ "
소지품을 챙겨 두열 뒤의 가운데 자리로 이동했다.
새로 옮긴 자리 왼쪽으로는 20대 초로 보이는 동양인 여자가 앉아 있었고 내 오른쪽으로는 나이가 좀 있으신 아저씨께서 앉아 계셨다. 아저씨는 알고 보니 아기 엄마의 친정아버지셨다.
기내 서빙이 시작되었다. 기내 방송으로 한 남자가 영어와 한국어로 이런저런 내용의 안내를 해 주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귀에 낯설지 않았다.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목소리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잠시 후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 자, 무얼 좀 마시겠어요? " 음료 카트를 끌고 온 남자 승무원이 나의 얼굴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권했다.
" 저 혹시 닥터 페퍼 있어요? " 내가 물었다.
" 아, 닥터 페퍼가 없네요. ^^ "
" 그럼 콜라로 한 잔 주시겠어요? ^^ "
콜라를 건네주는 남자 승무원은 마치 미군처럼 머리가 짧게 손질되어 있었는데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바로 알아보았다. 2년 전 디트로이트로 올 때 탑승했던 항공기에서도 승무원으로 함께 했던 그분이었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는데 그가 바빠 보여서 말을 걸지는 못했다.
한두 시간이 지났을까. 음료 및 기내식을 나누어 주고 조금 한가해졌을 무렵 그 남자 승무원이 내 옆을 지나고 있었다. 카트를 이용해서 다 먹은 일회용 컵을 수거하며 지나는 중이었다.
" 저 실은 2015년 9월에 인천에서 디트로이트로 오는 비행기에서도 선생님을 뵌 적이 있어요. ^^ "
내가 반가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 아, 그랬어요? 와, 제가 파리나 서울을 오가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군요. 반가워요. "
" 네, 선생님 목소리가 워낙 좋으시고 발음도 정확하셔서 확실히 기억이 납니다. "
그는 업무 수행 중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긴 대화를 지속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게 서로 인사를 나눈 후에 그가 내 자리를 지날 때마다 몇 차례에 걸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예상했던 그의 나이는 50대 중반이었는데 실제 그의 나이는 60대 중반이라고 했다. 정말 까무러칠 정도로 젊어 보였다. 피부는 깨끗했고 주름도 적었다. 말투도 목소리도 나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젊고 생기 가득하게 느껴졌다. 내 오른편에 앉아 계셨던 젊은 아기 엄마의 친정아버지와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친정아버지보다 이 남자 승무원의 나이가 세 살이나 위였지만, 얼굴만 보면 솔직히 승무원이 손아래로 보였다. 나와 승무원이 이야기를 나눌 때 옆의 아저씨도 말을 섞었는데 그분도 남자 승무원의 나이를 알고는 꽤 놀라는 표정이었다. 틀림없이 자기가 손위라 생각했던 것 같다.
남자 승무원은 우리나라 국적기 항공사에서 30대까지 일하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미국 항공사에 취직을 했고 지금까지 40년 동안 비행기를 탔다고 했다.
40년.... 아, 정말 압도적인 수치였다. 직장 생활을 40년 동안 지속한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그 기간의 반 동 채 못 채우고 실직 상태에 처하게 되는 무수한 직장인들이 있다는 걸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 제가 젊어 보이나요? ㅎㅎ 고마워요. 그런데 제 선배들에 비하면 전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제일 마지막으로 퇴직했던 선배의 나이는 90세가 넘어요. 그러니 저는 이렇게 열심히 일할 수밖에요. ^^ "
참으로 부러웠다. 어떻게 예순이 훨씬 넘도록 일할 수 있는지. 아니, 아흔두 살의 퇴직이라니... 이건 도무지 차이가 나도 너무나 크게 나서 입이 딱 벌어지는 것이 문화적 충격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 훈주씨는 미국에 무슨 일로 왔다 가시는 거죠? "
" 아, 전 친구의 초대로 동부 쪽에 여행을 다녀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이 저에겐 엄청난 의미를 가지게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미국과 관련한 일을 하거나 미국으로 건너가서 일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
"아, 그렇군요. 잘 됐네요. 좋은 소식이 있었으면 합니다. 전 시카고에 살고 있어요. 혹시 시카고에 올 일이 있으면 꼭 연락 주세요. 밖에서 우리 만나서 막걸리 한 잔 하면서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다면 좋겠군요. "
소중한 인연의 시작을 기뻐하며
기나긴 비행이 끝나갈 무렵 그는 나가기 전에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나는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길 기다린 후 뒤편으로 가서 그에게 명함을 건넸고 그도 내게 자신의 개인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는 남산에 있는 한 호텔에서 쉰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탑승할 예정이었다. 다음에 연락이 닿으면 서울에서도 다시 한번 따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심으로 그와의 재회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고 그렇게 우리는 인천 공항에 내린 비행기에서 아쉬운 작별을 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사흘이 지나도록 시차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나는 메일 체크를 하다가 그 항공사에서 보내온 항공기 서비스에 관한 설문을 받았다. 설문을 받아 읽으니 다시 60대의 그 멋진 승무원이 생각났고 설문 가운데 주관식 질문에 답하는 공간에 아래와 같이 나의 생각을 적어 보았다.
2015년 9월과 2017년 5월 10일에 디트로이트-인천 항로로 운항되는 비행기에 탑승한 이훈주라고 합니다.
두 번의 귀사 항공기 탑승에서 승무원 데이비드라는 분을 알게 되었는데 이분으로 인해 귀사 항공의 서비스가 얼마나 기분 좋은 경험을 하게 해 주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정확한 영어와 한국어 발음으로 기내 안내를 해 주었으며, 기내 승객들에게 서비스를 할 때 언제나 밝고 환한 미소로 매번 그에게 서비스를 받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경험을 하곤 했습니다.
제가 그에게 2년 전 디트로이트를 갈 때도 만난 적이 있다고 하면서 말을 걸었을 때, 그는 자기를 기억해 주어 고맙다고 하면서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마치 새로 사귀는 친구와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래전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귀사와 같은 세계적인 항공사에서 예순이 넘는 나이에도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볼 때 매우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모습은 나이보다 10년 이상 젊어 보였습니다. 뛰어난 자기관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 같았습니다.
데이비드께 개인적으로 감사를 표현하고 싶습니다. 덕분에 13시간의 지루한 비행이 훨씬 더 가볍고 기분 좋은 시간이 될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2017년 5월 14일 Hoon Joo, Lee 이 훈 주 올림
설문에 응답한 후 그의 명함을 찾아 그에게 이메일 한 통을 보냈다.
기분 좋은 비행을 할 수 있게 해 준 그에 대한 감사 인사와 더불어 이직 등 개인적인 일과 관련한 안부를 전했다. 또한 훗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그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고 서로 안부를 주고받기를 희망했다.
그에게서 하루도 채 안 되어 회신이 왔다.
훈주씨...
이렇게 연락이 되어 매우 반가워요 그리고 나에 대한 소견 또한 매우 고맙군요.
난 항상 손님들께 대하는 마음을 회사를 위해서 일하기에 앞서 한 사람이라도 내 친구가 되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일을 합니다. 특히 훈주씨 같은 훌륭한 젊은이들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특히 미래를 이끌 한국인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되지요. 그래요 훈주씨 내 늙은 눈에 비치는 훈주씨의 미래를 보며 더욱 즐겁게 비행했어요.
아마 이것이 나의 나이 듦을 피하는 세러피가 아닐까 합니다.
훈주씨 자주 내게 연락해 주시고 미국에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 주세요...
그렇게 내 마음에 한국인 파이팅이란 함성이 나오도록요...
훈주씨 다시 한번 우리의 만남을 마음에 새겨 둡시다...
데이비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