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가장 낮은 자세로 임하라.
맨처음, 요양보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가장 처음 주간보호센터에 취업했을 때의 나를 돌아보면 그 이유는 보다 분명해진다.
3년여전 그때, 나는 6개월여의 실업급여기간이 끝난 뒤 새로이 취업을 준비하여, 생산직에 갈 것이냐 요양보호사 일을 할 것이냐로 엄청난 고민을 했다.
단순 비교하자면 근로시간(둘다 8시간+1시간 휴식시간)과 최저시급이 적용되는 것은 동일하나,
생산직은 근로시간 내내 잠시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해야 하는데 반해, 요양보호사는 노동의 강도만을 단순히 비교하자면 적잖이 녹록碌碌한 편이라고, 마음속 주판알을 튕겼다.
그리고, 나는 주간보호센터 요양보호사로 진로를 골라잡았다.
좀덜 힘들면서도 급여는 동일한 쪽으로.
결론적으로, 돈만 생각하고 결정한 일이었다.
고백하건대, 요양보호사자격 취득과정을 밟으며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당시의 나는 정말로 요양보호사로서의 자세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때, 처음 겪어본 현장의 실상에 화들짝 놀라
나는 봉사정신이 없어서 안되겠다!고 솔직하고도 자조적인 변명을 뇌까리며 도망쳤다.
그시절, 나는 한없이 교만했다.
여기가 아니면 또 다른 일을 찾으면 된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들끓었다.
그후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요양보호사가 된다는 것은 돈만 바라보고는 할 수 없는 일, 봉사와 헌신의 마음이 눈곱만큼이라도 없이는 쉽지 않은 일...
그뒤로 만나게 되는 요양보호사 경력자들을 나는 그저 존경의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내 어머니가 직접적으로 병상에서 요양보호사의 돌봄을 받는 입장이 되고 주보호자로서 그들을 마주하게 되면서 나는 요양보호사로서의 일과 삶에 대해 새로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요양원에 실제로 머물렀던 총 8개월 남짓한 기간, 그중에서 마지막 1~2개월의 시간이 나에게는 특별한 시간이었음을 짐작한다.
하루하루 다시 일어나 나와 함께 걸으리라는 희망이 옅어져만 가는 어머니가 그 애처로운 몸짓으로 나의 마음을 흔들었고, 나를 위로하고, 끝내 나에게 결코 녹록치 않은 사명使命을 남기고 떠나셨다.
처음부터 이것은 나의 소명, 이라고 감격하며 은혜로이 머리숙여 끌어안은 게아니다.
그저, 당시에도 나는 일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사경을 헤매는 상황에서도 산사람은 살아야하기에, 나는 그저 일이 필요했으며 지난 5년간 새로이 우왕좌왕하며 적응하느라 애썼던 생산직에서의 고단함과 고달픔, 나이의 한계에서 느껴지는 절박함 따위가 나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혼란과 갈등 속에서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우연인듯 운명인듯 물 흐르듯 마음이 움직였을 뿐이다.
그로부터, 8월하순까지 대략 6개월동안 초보 요양보호사로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왔다.
그럼에도, 어쩌면 나는 내가 모르는 순간,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어머니가 보시기에 여전히 부족하고 겸손하지 못한 천방지축 하룻강아지였던가.
뜻밖에 늑막결핵으로 수술을 받고 잘라낸 피부만큼 위아래 피부를 당겨붙여야만 했다.
더 크고 심각한 결과로 수술이 이어질 수도 있었으나 그 정도로 끝날 수 있었던 것 또한 어머니와 하느님의 보살핌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수술하고 하루이틀째, 나는 실제로 오른쪽가슴팍을 제대로 펼 수 없었다.
위아래 피부를 당겨 꿰매 붙여놓았기에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힘써서 가슴을 펼라치면 가까스로 꿰매놓은 부위가 툭 터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어깨를 숙이고
가슴팍을 조금 앞으로 굽히는 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앞으로 구부정한 자세로 병실 복도를 걷던
순간, 깨달았다. 이것은
'너, 좀더 겸손하라'는 말씀이시구나!
가장 낮은 자세로 내 부모와 같이 당신들을 돌보라는 뜻이로구나.
이 또한 오만하고 섣부른 오류가 아니기를.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겸허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