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쓴 그림, 그림으로 피어난 글

존 버거의 문장과 호라티우스의 『시학』을 통해

by 김은령


존 버거의 문장과 호라티우스의 한 구절이
나의 작업 세계에 순풍처럼 스며들다.





° 빛의 모래시계 ° 부분도 _ 김은령





대학 시절, ‘그림과 시’를 만나다



나는 평소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을 극도로 기피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반드시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내 안 깊숙이 숨어 있던 용기가 강렬하게 깨어나곤 했다. 대학교 1학년 2학기, 그 용기가 고개를 든 순간이 있었다.

국어국문학과 4학년 전공과목을 수강하겠다고 신청서를 냈다. 이유는 단순했다. 수많은 과목명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던 이름, ‘그림과 시'. 주저 없이 버튼을 눌렀고, 두려움과 설렘을 안은 채 강의실 구석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낯선 시선과 압박감에 도망치고 싶었지만 꾹 눌러앉아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그림과 시' 때문이었다.

교수님은 출석을 부르다 생경한 이름에서 잠시 멈췄고, 찰나에 눈썹에서 입술 사이로 물결치듯 번지는 미소가 퍼져나갔다. 말보다 먼저 다가온 그 미소는 조용한 빛처럼 강의실의 공기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수줍고도 단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순간, 세상에는 침묵 속에서도 건네지는 언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작은 미소가 나를 새로운 세계의 문턱으로 데려다주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내 대학 시절은 ‘그림과 시’, ‘글과 그림’이라는 두 세계 속에서 흘러가기 시작했다.




° 빛의 모래시계 ° 부분도 _ 김은령





존 버거의 책, 그리고 깨달음

두 겨냥이 맞닿는 경계에서



어느 날, 교수님은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을 건네주셨다. 책 한 권이 내 안의 정체된 바람을 일으켜 작업 세계로 순풍처럼 스며드는 계기가 되었다. 책 속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대상과 닮게 그리는 것이 인물화의 조건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 닮음이란 생김새나 비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두 손가락 끝이 만나는 것같이 두 방향에서의 겨냥이 그림에 포착된 것이리라.
그리는 행위는 시간을 들추어내는 작업이다. 종이에 남겨진 낱낱의 자국들은 그녀가 태어나기 전에 상속된 유산처럼 여겨진다.
이틀 후 그녀는 그림을 가지고 오데사로 돌아갔고, 나는 이 포토카피를 남겼다.


이 문장들은 내게 강렬한 울림을 남겼다. ‘두 겨냥이 맞닿는 순간’ — 형상이 종이 위에 머물다 언어로 다시 피어나는 장면. 그림이 글이 되고, 글이 그림으로 돌아가는 순환 온 몸을 관통하는 전율이 돋았다.

존 버거는 그 경계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림을 ‘글로 쓴’ 사람이었다. 그림의 숨결을 문장의 호흡으로 옮기고, 빛의 농도를 문장의 쉼표로 번역했다. 그에게 글쓰기는 설명이 아니라 전이(轉移)였다.

그림이 멈춘 자리에서 언어가 다시 피어날 때, 나는 깨달았다. 글은 더 이상 해설이 아니라, 그림의 또 다른 형태가 된다는 것을.

나에게도 ‘글로 쓴 그림’은 그림이 언어로, 언어가 다시 형상으로 되돌아가는 하나의 숨이다. 존 버거가 그림을 글로 썼듯, 나는 빛을 언어로 쓴다. 두 겨냥이 맞닿는 경계에서, 언어는 다시 그림이 된다.




° 두 겨냥이 맞닿는 경계에서 ° _ 김은령





“시는 회화처럼” — 호라티우스의 시학



그 무렵, 호라티우스의 『Ars Poetica』에서 “Ut pictura poesis — 시는 회화처럼”이라는 문장을 만났다. 말의 결과 색의 결이 하나의 리듬으로 이어지는 순간, 두 세계가 서로의 숨결을 나누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림이 멈춘 언어라면, 시는 움직이는 그림이었다. 나는 그 경계를 오가며, 단어의 결로 색을 칠하고, 형상의 여백에 문장을 새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내 작업은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 — 글로 쓴 그림, 그림으로 쓴 시. 언어와 형상이 서로의 숨을 나누는 자리, 그곳에서 나는 오늘도 ‘두 겨냥이 맞닿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