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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초 듬뿍 넣은 비빔밥

내가 만들어 먹는 작고 소중한 한 끼

by 이현

지난 2월 어느 토요일에 시어머니와 통화하던 중의 대화이다.

“겨울초 보내줄게 함 무쳐먹어 볼래?”

“겨울초요? 그게 뭐예요?”

“무쳐먹기 좋은 나물이다. 조금 보내줄 테니까 한번 해 먹어 봐라.”


우리 부부의 식생활은 매우 단순한 편이다. 집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은 뻔하고, 번거롭거나 해보지 않은 요리에 도전하지 않고, 오래 보관하기 힘든 야채나 과일, 생선 등 신선식품을 구매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그러다 보니 가공식품에 의존하게 되고, 외식을 하더라도 늘 가는 안전한 곳만 간다. 그런 우리에게 그나마 식생활의 범위를 넓힐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는 분은 남편의 어머니다. 이번에도 겨울초라는, 내가 직접 사다 먹을 일은 절대 없을 것 같은 처음 듣는 식재료를 보내주신다는 시어머니의 권유에 냅다 받겠다고 대답했다. 겨울에 나는 풀인가? 그런 풀이 한둘이 아니지 않나? 포털사이트에서 '겨울초'를 검색해 봤더니 가장 먼저 화면에 등장한 것은 유채였고, 스크롤바를 아래로 아래로 내려봐도 유채나물무침 레시피 따위의 것들만 보일 뿐 겨울초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었다. 검색을 멈추고 '유채나물=겨울초'라기보다는 '유채나물∈겨울초'라고 혼자 적당히 결론을 내려버렸다. 나처럼 앎의 의지가 매우 나약한 인간의 좋은 핑곗거리, '뭣이 중한데'의 마음.


모르기로 마음먹은 나와는 달리 흙 위로 귀엽고 이름 모를 풀잎들이 싹을 틔우는 봄의 초입, 먹을 수 있는 풀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고 달래, 냉이, 쑥, 돌나물, 두릅 같은 풀의 이름들을 알고 열심히 채취하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을 볼 때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마트에 가서 이름표 붙은 채소들을 보고서야 반가운 마음에 이름 한번 불러보는 나로서는 자연 속에서 직접 체득한 그분들의 삶의 지혜가 멋지고 귀하다.


부산에서 온 손질이 잘 된 겨울초 두 봉지가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내 시선을 강탈한 지 일주일이 되었다. 냉장고 안쪽 깊숙이 밀어 넣었다가는 그 존재를 영영 잊게 될까 봐 문을 열자마자 바로 보이는 명당자리를 내어준 채로. 넙죽 받겠다고 했을 때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막상 받아 놓고는 손댈 엄두가 나지 않아 볼 때마다 부담스러운 손님을 보듯 데면데면했다. 나물 요리를 하는 것은 나 같은 조무래기에게는 용기가 많이 필요한 일이었다. 미루고 미루다 결국 겨울초를 따서 먹기 좋게 씻고 다듬어 보내주신 시어머니의 얼굴을 몇 차례 떠올리며 미루기를 멈췄다.


대체로 간소한 게 좋은 나는 요리를 할 때에도 미니멀리스트를 추구한다. 재료의 맛을 헤치지 않도록 조리의 과정은 단순하게, 양념 또한 최소한으로, 포스트잇 한 장짜리 레시피 분량으로 겨울초 나물 무침을 만들어 보았다. 끓는 물에 잘 씻은 겨울초를 데친다. 시간을 정하기보다는 숨이 죽어 이 정도면 씹어 먹는데 무리는 없겠다 싶을 때 건져 낸다. 찬물에 휙휙 헹궈 물기를 쭉 빼낸다. 소금, 진간장, 참기름을 적당히 넣어 조물조물 무치고 마지막에 통깨를 솔솔 뿌려주면 끝이다. 내게 요리의 성공 기준은 기대했던 맛이 실제로 구현되는 것인데, 처음 만들어 본 겨울초 나물 무침에서 상당히 만족스러울 만큼 기대했던 맛이 났다. 나물 무침류의 반찬은 엄마가 차려준 밥상이나 백반집 또는 정갈한 한정식집에서나 먹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나 쉽게 내 손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니, 신기했다. 세상 사는 법 하나 배운 기분이 들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겨울초로 활용해서 음식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이었다.


그렇게 뚝딱 만든 겨울초 나물 무침을 보니 비빔밥이 먹고 싶어졌다. 소분해 둔 밥을 냉동실에서 하나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우는 동안 엄마가 보내 주신 멸치볶음과 계란 2알로 프라이도 후딱 준비했다. 따뜻한 밥 위에 계란프라이와 멸치볶음 그리고 갓 만든 겨울초 나물 무침을 듬뿍 올리고, 고추장 한 스푼과 참기름 듬뿍 넣어 성글게 섞은 비빔밥을 숟가락 가득 퍼서 크게 한입 먹었다. 단출하지만 참을 수 없는 아는 맛, 맛있다 맛있어.


원하면 내일 받아볼 수 있는 밀키트를 인터넷으로 주문할 수 있는 시대이고, 동네에도 무인 밀키트 가게가 여럿 있지만 이용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음식을 만들어 먹는 기분을 낼 수는 있겠지만 이걸 굳이 표현하자면 외식을 집에서 하는 기분 혹은 원데이클래스 같은 느낌이랄까. 요리에 필요한 식재료를 선별하고, 그 재료들을 적당한 양만큼 구매하고, 시간과 품을 들여 만들어 먹는 한 끼. 그것의 소중함을 안다. 내가 먹는 음식을 내가 준비해서 완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생존의 자신감과 같은 결을 가진다. 여전히 동네마트에 가면 가공식품 코너를 서성이는 시간이 많지만, 야채, 수산물, 정육 등 신선식품을 둘러보며 어떤 재료로 어떤 음식을 만들어 먹을지 즐거운 상상을 하는 시간을 점차 늘려 가는 중이다. 그렇게 내 식생활을 더 풍성하고 즐겁게 향유하고 싶다. 산책하다가 풀이 무성히 자란 곳에서 오늘도 무언가 캐고 있는 어르신을 보면 여쭤봐야겠다. "어르신, 지금 캐고 계신 나물이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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