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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도 기행 1

인연(因緣)

by 이현

나에게도 짝꿍에게도 조부모 중 남아 계신 분은 각자의 외할머니뿐이다. 이제는 외할머니 친할머니 나눌 필요도 없이 한분만 살아 계시니 굳이 구분을 하며 부를 필요도 없어졌다. 나의 할머니는 엄마가 아주 어릴 적, 당시 국민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바다 건너 오사카로 가서 지금까지 그곳에서 정착하고 지내고 계신다. 내가 처음 할머니를 뵌 것이 스무 살 무렵이었고, 그 후로 지금까지의 만남을 다 합쳐도 다섯 번이 넘지 않는다. 자연스레 할머니와 쌓은 정도 별로 없다. 혈연관계의 애틋함인지 만나고 헤어질 때 울컥하는 마음만이 남아 있다.


반면 짝꿍과 할머니와의 관계는 나에 비해 훨씬 유대가 깊다. 짝꿍의 할머니는 제주 가파도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고 계신다. 할머니의 딸(짝꿍의 어머니)은 가파도 초소로 발령받은 남자(짝꿍의 아버지)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는 가파도를 떠나 부산에 정착했다. 그리고 첫째 아들(나의 짝꿍)을 낳았고, 2년 뒤 둘째 아들을 낳았다. 짝꿍과 결혼 후 지금까지 봐 온 어머니는 매일 가파도 할머니와 통화를 하고 안부를 확인하신다. 오래전부터 그래오신 것처럼 보였다. 나도 오랫동안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왔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 통화가 전부인데 철없는 내 눈에는 그런 어머니가 참 신기해 보였다. 그렇게 모녀지간의 매일의 통화로 쌓인 삶의 정보가 어마어마해서 나는 종종 짝꿍의 어머니가 부산에 살고 계신지 가파도에 살고 계신지 헷갈릴 때도 있다. 짝꿍이 중학생이던 시절까지 방학 때마다 어머니는 두 형제를 데리고 가파도에 가서 한 달씩 지냈다고 했다. 짝꿍은 어린 시절 일 년에 두 번씩 섬에서 지낸 여름과 겨울의 추억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고, 짝꿍의 그런 점이 나도 참 좋았다.


나는 제주에 사는 동안 가파도에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섬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어떻게든 섬을 벗어나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래서인지 섬 속의 섬에 관심을 갖는 일도 결코 쉽지 않았다. 제주를 떠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지금의 짝꿍과 만나 연애를 했는데 우연히도 둘 다 제주에 연이 있었다. 함께 제주를 여행하며 처음으로 가파도에 발을 디뎠던 것이 벌써 10년 전 일이다. 가파도는 소소한 재미가 있는 곳이었다. 오르막길이 거의 없고 납작하게 펼쳐진 섬. 가장 높은 곳은 해발 20.5m의 소망전망대. 그늘이 거의 없어 한낮의 땡볕을 견뎌야 하고, 바람 많다는 제주도에서도 특히 유난인 곳. 국토 최남단의 마라도를 가까이 볼 수 있고, 섬 둘레길을 다 걸어도 고작 4km인 곳. 봄에는 청보리 축제가 열리고, 올레길이 조성되면서 인적이 늘어난 곳. 주황색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해가 지고 뜰 때 반짝반짝 어여쁜 곳. 길냥이 같기도 하고 집냥이 같기도 한 고양이들이 호젓하게 걸어 다니는 애묘인들의 천국.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가파도에 여러 번 다녀왔지만 나는 갈 때마다 그곳이 늘 좋았다.


가파도에 갈 때는 보통 오전에 배를 타고 들어가서 오후 마지막 배로 나오곤 했다. 5~6시간 정도 섬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할머니와 한 끼 식사도 하고 수다도 떨고 산책도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다가 작년부터는 당일치기에서 1박 코스로 바꿨다. 오후 배를 타고 들어가서 다음날 오전 배를 타고 나왔더니 가파도의 저녁, 밤, 새벽 그리고 아침까지 다채롭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작은 섬에서 평범한 나날을 보내는 할머니에게 마흔도 훌쩍 넘은 손주가 찾아와 하룻밤 지내는 일은 특별한 것이었고, 90세에 가까운 할머니와 현재진행형으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가는 것은 짝꿍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시'자 붙은 할머니댁에서 하룻밤 지내는 것이 생각보다 편한 것도 한몫했다. 관광객이 떠난 조용한 섬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 가파도에서 처음 자던 날, 새벽에 화장실 다녀오던 짝꿍이 나를 조용히 깨워 마당으로 데리고 나갔고, 졸린 눈 비비며 올려다본 하늘에 쏟아질 것 같이 반짝거리던 무수했던 별들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능하면 자주 시간 내어 가파도에 가고 싶다. 할머니 집 앞에서 "할머니, 저희 왔어요."하고 큰 소리로 말하며 들어가면 지금처럼 정정하신 할머니가 오래도록 우리를 맞이해 주셨으면 좋겠다. 언젠가 그럴 수 없는 날이 반드시 오겠지만 너무 슬퍼하기만 하지 않고 즐거웠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짝꿍과 함께 할머니와 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짝꿍이 어릴 적 가파도에서 봤던 별들, 목걸이처럼 걸어 간식으로 먹었던 전복, 통통배 타고 나가 바다 한가운데서 수영하던 것들을 나에게 이야기해 주듯이. 그래서 기록해보고 싶어졌다. 가파도에서 겪었던 일들과 만났던 사람들, 아름다운 풍경들에 대해서. 가파도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서. 이 모든 것은 짝꿍과의 인연으로 시작되었고, 그 인연이 새삼 재밌고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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