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의 옹골찬 무게감
‘나는’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글은 어쩐지 오글거린다. 무의식적으로 ‘나는’이라고 쓰고서 노트북 화면에 적힌 그 글자를 눈으로 확인을 하고서야 안다. 제발 좀 그만하자, 이 자의식 덩어리야. 다시 백스페이스를 툭툭 누르며 글자를 지운다. 자, 다시 어떤 말로 글을 시작해 볼까 궁리를 하다가도 결국 ‘나는’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들만 떠오른다. 어쩜 이럴까 싶다. 내 이야기 말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같다. 부끄럽다, 지난 세월 누군가를 붙잡고 떠들었던 나라는 사람의 구구절절한 말들이. 요즘 말로 ‘안물안궁’이 분명했을 시시하고 하찮은 말들이.
나 같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쓰는 행위이지 않을까. 뱉어 놓고 상대방의 반응을 살펴야 하는 말하기가 아닌, 타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어떤 페이지에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혼자 끄적여보는 쓰기.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것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거대한 담론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내 마음속 사소한 이야기들이었으니까. ‘나는’ 같은 말이 툭툭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자의식 강한 것들이었으니까.
일기든 편지든 여행기든 독후감이든 나는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계속 꾸준히 쓰지는 못했지만 몇몇 흔적들이 인터넷 곳곳에 유물처럼 남아 있다. 게으름, 생활의 고단함 같은 핑계로 흐지부지 중단되었고, 그런 것들이 가끔씩 가슴 한구석을 콕콕 찔렀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에서 멀리 둔 탓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편하고 쉬운 것들로 찔린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는 무언가에 점점 더 자주 찔려 아팠다.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왜 안 해? 왜 힘들다는 소리만 하며 살고 있어? 진짜 속마음을 외면하지 못한 내가 나를 찌르며 팩트폭격을 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아프기만 할 거야?
대단한 결과물을 기대하지 말고 그냥 시작해야 한다는 걸 안다. 그래야 시작할 수 있다. 특별한 날일 필요도 없다. 그냥 뜬금없이 무언가를 써야 할 것 같은,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그때 하면 된다. 그렇게 해서 오늘, 참 오랜만에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한 단어를 툭 내뱉어보고, 다음은 어떤 말로 이어 붙일까 한참을 머뭇거리고 망설이다가 또 한 단어를 이어 붙이는 식이다. 내 속의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싶었던 사람이 맞나 싶다. 하지만 실망하지도, 볶아치지도 말아야 한다. 유년기 한글을 익히는 마음으로, 칸이 그려진 한글놀이 노트를 천천히 채워가는 기분으로 글쓰기를 하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그래야 지치지 않고, 질리지 않고, 오래오래 써 나갈 수 있을 테니까.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구슬이 생각난다. 조그맣고 동그란 구슬을 손바닥에 올리면 느껴지던 그 옹골찬 무게감이 나는 참 좋았다. 그 구슬 같은 글을 써 나가고 싶다. 막연히 공허했던 마음을 한 글자 한 글자 채워가며 무게감을 느껴보고 싶어졌다. 결국은 쓰고 싶은 마음을 외면하지 않고 마당에서 구슬 굴리며 놀듯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