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시즈오카 7화
날이 맑으면 도쿄에서도 보인다는 후지산이지만 '산이 산이지', 하며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보게 된 어느 사진에서 본 후지산은 일반적인 일본의 상점가 뒤로 보이는 압도적인 크기의 후지, 그리고 별이 쏟아지는 호숫가 캠핑장의 후지였다. 꼭 봐야겠다고,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렌터카 없이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기로 했는데, 타누키 호수까지 가는 버스는 하루에 많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 계산을 잘 해야 했다. 목적지는 시라이토 폭포와 타누키 호수.
시즈오카 역에서 전철을 타고 후지 역으로 이동한다. 후지 역에서 전철을 갈아타고 후지노미야 역에서 내린다. 후지노미야 버스 정거장에서 시라이토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구경한 뒤 타누키 호수로 가는 버스를 타는 것이 대략적인 일정이었다. 구글맵과 여러 블로그를 뒤져 시간표를 확인하며 갔으나, 후지 역에서 전철을 갈아탈 때 실수를 해서 일정이 어그러졌다.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 사이에 출발하는 버스가 한 대 있었다. 후지노미야 역에서 나와 육교를 건너 내려가면 버스 티켓을 살 수 있는 창구가 있고, "시라이토, 타누키"라고만 말해도 매표원이 일정을 확인해주었다. 왕복하는 차표를 살 수 도 있고, 나는 교통카드(TOICA)를 사용했다. 전철 창문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후지산은 신기루 같았다.
이렇게 순조롭게 일이 풀리는가 하였는데, 또 예상치 못했던 일이 생겼다. 우리나라 버스처럼 벨을 눌러 내리는 표시를 했어야 했는데, '유명한 관광 지니까 당연히 세워주겠지' 생각한 것이 실수였다. 심지어 버스 안에 다른 가족 단위의 한국인 여행객이 있었는데 아무도 벨을 누르지 않아 기사님은 무서운 속도로 시라이토 폭포를 지나쳐갔다. 그다음 정거장은 도저히 걸어갈 수 없을 거리의 어느 목장이었다. 당황한 나와 한국인 가족분들은 목장에서 버스 시간을 알아보고 방황했다. 다행히 가족 분들은 콜택시를 불렀다 했고, 어차피 두 대를 불러 자리가 남으니 함께 타고 가자고 먼저 말씀해 주셨다. 시라이토 폭포 입구에 내려 500엔짜리 동전을 내밀었으나 한사코 마다하셨다. 여행지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에 관심은 없지만 오늘처럼 선의의 도움을 받았을 때엔, 나중에 다른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기로 마음먹는다.
시라이토 폭포는 사실 존재 조차 몰랐었는데, 이 지역에서 보통 함께 방문하는 관광지라 구경하기로 했다. 제주의 천지연, 가장 최근에 본 스위스 라우터브루넨의 폭포 등 지금까지 수많은 물줄기를 봐왔지만, '폭포의 나라' 하면 나에게는 여전히 아이슬란드다. 세계 3대 폭포 같은 것을 아직 못 봐서인가.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다. 시라이토 폭포는 물빛이 아주 예쁘고 물줄기가 여리여리하게 떨어졌다. 무지개가 피어나서 꼭 요정이 나올 것 같았다.
바로 다음에 오는 타누키코 행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되돌아온 시간을 제외하고 30분 정도 이내에 부지런히 구경해야 했다. 무사히 버스를 타고 내리는 시점에 벨도 잘 눌렀다. 버스에서 내리자 찬 공기와 함께 적막함이 다가왔다. 버스가 떠나버린 후엔 너무 조용해서 귀가 이상해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곳 타누키 호수는 캠핑장이 유명해서 캠핑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유명한 듯하다. 호숫가에 캠핑장이 마련되어 있고, 뒤편에는 후지산이 자리 잡고 있으니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겨울이라서인지 캠핑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중간중간 낚시하는 아저씨들만 보였다.
호숫가를 따라 시계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빌릴 수도 있었지만, 이곳에 유일하게 있는 호텔 대욕장에 가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이 생겼지만 늘 만실이던 이 호텔 주차장에는 차가 가득했다. 호텔 아래쪽으로는 물에 비친 후지산이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보이는 전망 데크가 있다. 한참 앉아서 산 끝에 걸려있는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조금 한기가 들 때쯤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투숙객이 아니어도 대욕장을 이용할 수 있고 가격도 420엔 정도로 아주 저렴했다. 좋은 료칸에 가본 적은 없지만 여지껏 몸 담그고 본 풍경 중에 1등 할 만했다. 전면 창으로 후지산이 가득했다. 비록 수건이 없어서 런닝으로 몸을 말려야 했지만.(수건을 꼭 챙겨가세요) 발갛게 달아오른 두 뺨으로 로비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후지노미야 역으로 돌아가는 버스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 호수 한 바퀴를 둘러보기로 했다. 한 시간 정도 걸은 듯하다. 혼자 호숫가를 걷는 일이 그리 낯설지 않아 생각해보니, 프랑스 안시 호수를 추워하면서, 물빛과 알프스 산세에 감탄하면서 걸었던 기억이 났다. 후지산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아서 땅을 보며 걷다가도 또 쳐다보고, 등지고 걷다가도 돌아서서 쳐다보고 했다.
발목이 시큰거릴 때쯤 시간을 맞춰 호텔로 돌아와 이곳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일몰로 붉게 물든 후지를 보고 싶었지만, 막차를 타도 해가 질 것 같지 않았다. 대신 시즈오카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분홍색의 후지를 볼 수 있었다. 시즈오카 역에 내려 지하상가를 쭉 따라 숙소로 가는 길에 텐동 체인점인 '텐동텐야'에서 튀김 덮밥을 먹으며 꽁꽁 얼었던 몸을 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