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미리트립to유럽 2화
시차 적응을 못한 일가족은 새벽 네 시에 잠이 깨서 컵라면과 누룽지를 끓여 먹었다. 모두 잠들어 있을 것 같은 시간, 누군가 현관문을 두들겼다. 우리가 너무 시끄러웠나? 유럽의 아파트는 천정이 높아서 방음이 잘 안되나? 순간 많은 생각을 하며 목소리를 낮추고 현관문 앞의 사람이 돌아가길 기다렸다. 현관문 앞의 사람은 지치지 않고 간격을 두고 노크를 했다. 문을 열어보니 옆집 아주머니가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서 있었고, 에어비앤비의 친절한 호스트가 "그럴 수도 있다"고 미리 알려줬던 사실이 떠올랐다. 안도하며 다시 문을 닫았지만, 그녀는 한 시간에 한 번 정도 꾸준하게 방문했다. 혼자였다면 무서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상황이었지만, 여럿이 주는 힘은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대체로 호텔이 비싼 편이었다. 저마다의 기준의 다르겠지만 나의 기준은 2인 20만원 이상인 곳이 대다수이면 이 도시는 호텔 물가가 비싸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도 여전히 혼자 하는 여행에서는 호스텔의 도미토리나 캡슐호텔을 이용하곤 하지만 호텔의 편리한 맛을 한번 본 이상 동행자가 있을 때엔 호텔을 선택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예산과 맞지 않는다면 에어비앤비를 찾아보기 시작한다.
가족여행에서의 에어비앤비 선택지는 상당히 괜찮은 편이다. 우선 숙박비를 가족 인원수로 나눠보면 갑자기 안도감이 확 들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컵라면뿐만 아니라 봉지라면도 커버가 가능하고, 부모님께 "현지인 집에 방문한 기분"을 느끼게 해 드릴 수 있다. 딸들과 자유여행 가는 것만으로도 자랑 게이지는 한껏 올라가지만, 패기지 여행과는 다른 어떤 포인트를 만들어 드리면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화장실이 한 개라 불편하다고요? 우리네 부모님은 보통 우리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신다는 것을 감안하면 크게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님과의 도시 여행은 조금 어려운 느낌이다. 하루 종일 걷거나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면서 미술관과 카페를 전전하는 것이 내가 여행지로서의 도시에서 주로 하는 일이다. 빈처럼 큰 도시에서는 최소 5일은 머무르면서 하루에 미술관 한 군데, 카페 두 군데 다니면서 비포 선라이즈에 나왔다는 스팟들도 찾아가고, 쇤부른 궁전 잔디밭에서 여유도 부려야 마땅한데 우리 가족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였다. 네 사람이 원하는걸 모두 할 순 없었지만 우리 자매는 최선을 다해 동선을 짰다. 계획대로 움직이진 않았지만.
일곱 시가 되기 전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보면서 빈 시내로 걸어 나왔다. 약간 코가 시린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출근하기에도 이른 시간인지 길에도 사람이 없었다. 20여분을 걸어 카페 센트럴 (Cafe Central)에 도착했다. 오픈 시간이 일곱 시라 이른 아침 시차 적응을 못해 방황하는 동북아인 가족을 맞아주었다. 이미 꽤 많은 여행자들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패스츄리와 요거트, 커피, 주물팬에 구워 나오는 베이컨과 달걀 모두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의외로 입이 짧은 아빠가 열심히 잘 드셔서 다행이었다. (커피에 설탕을 세 스푼 정도 크게 넣어 맥심커피처럼 만들어 드리는 것이 포인트) 저녁시간에 있다는 피아노 공연은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고풍스럽고 분위기는 만족스러웠다.
쇤부른이 아쉽긴 했지만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벨베데르가 더 끌렸달까. 시청사 앞에서 트램을 타고 벨베데르 (Belvedere) 궁전으로 향했다. 트램 정류장까지 걸어가면서 60년 만에 처음 보는 유럽이 아빠에게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 조금 아득했다. 트램은 맛보기로만 한 번 타보고 그 후로는 모두 우버를 이용했다. 벨베데르 상궁의 클림트는 모나리자 뺨치게 인기가 좋았고, 우리 네 명은 각자의 방식으로 미술관을 즐겼다.
나슈마르크트 (Naschmarkt) 시장에선 호객하는 아저씨에게 홀려서 올리브 절임과 견과류를 5만 원어치나 사버렸다. 당한 느낌에 억울해하며 후회하는 나와는 달리 엄마는 꽤 만족스러운 눈치였고, 결과적으로 여행 내내 가지고 다니며 좋은 간식이 되어 주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탓에 체력이 조금씩 떨어져 가고, 시장에서 랍스터를 사 먹자는 엄마와 배가 안 고프다며 그냥 가자는 언니 사이에 날 선 갈등이 시작되었다. 짜디짠 케밥을 사 먹는 것으로 어중간한 타협을 본 뒤 레오폴드 미술관 (Leopold Museum)에서 클림트와 쉴레를 보았다. 여긴 우리 자매가 꼭 가고 싶었던 곳. 부모님과 함께라고 해서 내가 하고 싶은 걸 아주 배제하지는 않아야 모두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는 것 같다. 의외로 우리가 좋아하는 걸 부모님이 좋아하는 경우도 있다. 미술관 앞의 광장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 날씨였다.
집으로 돌아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체력을 회복하고 다시 시내로 나가 모차르트 생가와 슈테판 성당을 구경했다. 계속 공연을 보고 싶어 하는 엄마를 위해 어느 성당 지하에서 하는 바이올린 듀엣 공연을 관람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대실패였다. 차라리 슈테판 성당 앞에서 호객하는 모차르트 분장을 한 궁중 악사들의 공연이 훨씬 나았을 뻔했다. 나는 지금 이곳에 또 올 거라는 생각으로 다니지만, 부모님은 분명 그렇지 않으실 거라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여행이 성공에 성공만을 거듭할 순 없지 않을까. 두고두고 후회하기보다는 호방하게, 웃음이 나는 에피소드로 승화시키는 정신승리도 여행자의 능력이라고 믿고 싶다. (아쉬운 건 사실이지만)
나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은 하지 않는 편이고, 낯도 가리는, 한마디로 내성적인 성향의 사람이다. 이런 성격이다 보니 단지 안전을 위해 모르는 동행자를 구하거나, 현지에서 누군가를 만나 스몰토크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차라리 혼자 다니며 모험을 하고, 나의 안전을 담보로 맡기는 편이다. 나 같은 조용한 사람은 여행의 경험치가 조금 떨어질 수는 있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현지인과의 교류가 있어야만 진정한 여행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휘둘리지 않을 만큼의 짬바는 쌓였다. 어떤 여행 방식이 옳다고 할 수 없으니 안타까워할 필요도, 부러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