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미리트립to유럽 6화
유럽여행을 하다 보면 국경이 모호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출입국 관리소의 무장한 직원도 없고 여권에 쾅 찍는 도장도 없다. 도로에는 대부분의 차들이 같은 번호판을 달고 있고 알파벳으로 작게 쓰여있는 약자로나마 저 차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있을 뿐이다. 육로로 국경을 넘으면 달라지는 표지판 색깔과 언어, 가로수의 모양, 달라지는 제한속도로 '아, 지금 넘었구나'하고 만다. 여섯째 날은 국경을 넘자 거짓말처럼 풍경이 달라진 그런 날이었다.
아델보덴의 호텔 침구는 강행군에 지친 자매를 숙면하게 했다. 12시 체크아웃 때까지 호텔을 충분히 즐기기로 했다. 아쉬웠던 건 어제까지만 해도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은 구름이 낮게 깔려 회색빛으로 우중충했다. 이렇게 되면 "알프스 산자락 아래 수영장 인증샷"을 남길 수가 없었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스위스 호텔답게 조식 뷔페에는 치즈 섹션이 화려했다. 지금껏 먹은 조식 중 가장 따뜻하고 다양한 메뉴로 식사를 하고 수영장엘 갔다. 이 시간을 위해 아빠의 수영복까지 준비한 치밀함! 수영장은 예상보다 무척 아담했고, 알프스 산자락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네 식구는 깔깔대며 물놀이를 즐겼다. 가득 내려앉은 구름은 체크아웃할 시간이 되어서야 조금 걷혔다.
오늘의 운전대는 아빠가 잡았다. 강원도에서 운전병으로 군 생활을 한 아빠의 운전 실력은 특히 꼬불꼬불한 산길에서 십분 발휘된다. 푸른 잔디 위에서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그 뒤로는 엄청난 설산이 보이는, 말 그대로 그림 같은 풍경들이 이어졌다. 지금 이 풍경을 지루해하지 않으려 눈에 꾹꾹 눌러 담으며 애를 썼다. 오늘의 목적지는 르 코르뷔지에가 건축한 프랑스의 롱샹성당(노트르담 뒤 오)으로 출발지 아델보덴에서 세 시간 정도 거리였다. 짧은 일정에 프랑스까지 가는 게 무리였지만 엄마의 오래된 위시리스트였다. 부모님께는 여행의 선택지가 여행사를 통한 패키지여행밖에 없기에 조금 고생스러워도 자유여행에서만큼은 원하는 바를 되도록 맞춰 드리려 하는 편이다.
프랑스 국경을 넘자 도로의 나무에서도 괜히 프랑스 느낌이 나는 것 같았다. 노랗게 물든 낙엽으로 완연한 가을이 느껴졌다. 롱샹성당은 독특한 외관과 내부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으로 유명하다. 건축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유럽의 여느 성당과는 달랐다. 관람객은 우리 가족 외에 한 팀밖에 없어 한적한 시골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을 들여 안팎을 천천히 구경했다. 이번 여행이 아니었다면 엄마는 따로 오기 힘들 곳이라는 게 느껴져서 무리해서라도 오길 잘했다 싶었다.
롱샹(Ronchamp) 시내에는 마땅한 호텔이 없어서 숙박 예약 사이트를 뒤지다 근처에서 특이한 숙소를 찾았다. 프랑스 고성에서의 하룻밤. 특별한 경험이 될 것 같아 모험을 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숙박시설로 개조를 했겠지 싶었는데, '진짜' 고성이었고 가구며 커튼이며 변기까지 예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체크인도 아담한 테이블에서 이루어졌다. 우리 방은 성 끝의 원형탑 쪽이었는데, 어쩐지 제인 에어의 비밀 탑이 떠오르면서 조금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는 독일권으로 (개인적으로는) 음식이 맛있는 지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프랑스에 왔으니 맛있는 저녁 한 끼를 먹어보려고 숙소 주인에게 식당을 추천을 받아 길을 나섰다. Villersexel은 동양인이라고는 일 년에 한두 번 올까 말까 할 듯한 동네였다. 오로지 여기에 사는 사람들의 시간에 맞춰 돌아가는 듯했다. 빵집도 오전에만 문을 열고, 레스토랑도 런치와 디너 사이에 쉬는 시간이 길었다. 모두 가게 문을 닫고 본인들의 삶을 사는 것이 몹시 부러웠다. 식당에서는 직원들이 아무도 영어를 못했지만 메뉴판을 찬찬히 살펴 음식을 주문했다. 따뜻한 고트 치즈가 올라간 샐러드와 크림리조또를 너무나 맛있게 먹으며 역시 프랑스다! 생각했다. 번역기를 돌려 소시지로 추정되는 메뉴를 시켰는데, 대창에 속을 넣은 듯한 음식이 나왔고 웬만한 음식에 잘 도전하는 엄마와 언니도 지독한 냄새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급하게 식사를 마무리했다.
냄새로부터 도망치듯 식당에서 나와 어둑해진 밤거리를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해가 지니까 고성은 더욱 스산해졌고 벽난로에서 곧 뭔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결국 네 식구가 한방에서 잠을 청했다.
3년이 지난 지금도 이 숙소 얘기를 할 때면 깔깔대고 웃는다. 무모해 보이는 모험일 순 있어도 흔치 않은 경험이 확실히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되는 것 같다. 가볼까 말까 망설여지는 곳이 있다면 한 번 시도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