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다면, 함께 꺼내야 할 말들
“엄마가 같은 반찬을 세 번 샀어.”
“아빠가 늘 쓰던 모자를 보고 ‘이거 내 거 아니야’라고 하셨어.”
처음에는 단순한 실수라고 넘긴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 가족들은 본능적으로 느낀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신호를.
그때부터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된다.
“병원에 모시고 갈까?”, “설마 치매는 아니겠지?”, “언제,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 말을 꺼내는 내가 나쁜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사례 1. “엄마는 괜찮은데 왜 자꾸 병 취급해?”
딸 윤정 씨는 어머니의 반복되는 기억 착오가 걱정되어 병원 검사를 권했지만, 어머니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냥 나이 들어서 그런 거야. 왜 오버해?”
가족의 우려가 때로는 당사자에게 불신이나 공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윤정 씨는 설득 과정에서 감정이 격해졌고, 며칠간 서로 연락을 끊었다.
사례 2. 형제간 인식 차이
정윤호 씨는 어머니가 약을 빼먹고 전기밥솥을 여러 번 태우는 모습을 보고 치매 검사를 제안했지만, 여동생은 “엄마한테 그런 말 하는 건 불효야”라며 대화를 회피했다.
몇 달 후, 어머니는 집에서 넘어져 입원했고 중기 치매 진단을 받았다.
대화를 시도한 사람은 “내가 너무 앞서나간 걸까?”라고 자책하고,
대화를 피한 사람은 “이제 와서 어쩌라는 거야”라며 방어적으로 변한다.
하지만 갈등의 본질은 누구의 잘잘못이 아니라,
‘아무도 이 상황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점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병원에 가자고 하면 화내실 텐데요.”
많은 어르신들이 자신의 기억력 저하를 ‘나이 탓’으로 여기거나, 치매 진단을 ‘망가지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문화적 영향도 크다.
이럴 때는 ‘치매 검사’라는 말 대신, 건강 문제나 컨디션 점검을 핑계로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요즘 어지럽다 하셔서 건강검진 예약했어요.”
“최근에 약이 바뀐 것 같던데, 병원에서 다시 확인하면 좋을 것 같아요.”
“건강센터에서 어르신 대상 인지검사 해준대요. 요즘은 다들 받아본대요.”
직면보다는 우회, 낙인보다는 관심, 불안보다는 공감이 중요하다.
“엄마, 요즘 많이 피곤하시죠?”
“내가 너무 걱정이 돼서 그래요.”
“우리 같이 건강검진받으러 가요. 나도 같이 검사받을게요.”
전문가들은 ‘치매’라는 단어 대신, 건강과 일상생활 변화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걸 권한다.
첫 대화는 진단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싸움이 아니라, 불안을 함께 나누는 ‘연결의 시간’이어야 한다.
가족 갈등, 누구의 책임일까?
사례 3. “형은 아무것도 안 하면서 훈수만 둬요.”
장남은 “요양원은 절대 안 된다”면서도 병원 예약이나 복지서비스 신청은 하지 않는다.
주양육자인 둘째 딸은 점점 지쳐간다.
“형은 효심만 있고, 나는 실무만 있어요.”
치매 초기 가족 간 역할 분담 문제는 감정적 갈등으로 번지기 쉽다.
이럴 때는 외부 전문가 개입이 매우 중요하다.
“등급 신청이라도 받아놔야 하나…”
진단을 받았다고 바로 요양시설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치매 초기 단계에서도 장기요양등급을 신청하면,
일상생활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공적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사례 4. 등급 신청으로 변화된 일상
김민지 씨는 어머니가 같은 음식을 연속해서 만드는 모습을 보고 장기요양등급 신청을 결심했다.
“복지로는 너무 복잡했는데, 지인이 알려준 ‘순시미’라는 플랫폼에서 상담받고 신청을 도와줬어요.”
인지지원등급(등급 외 A)을 받고, 주 2회 요양보호사 방문과 인지훈련 프로그램을 이용하며,
“이제 저도 주말에 숨 쉴 수 있어요. 무엇보다 어머니가 혼자가 아니라는 게 느껴져요.”
요양보호사 방문 돌봄 서비스
인지지원 프로그램 (치매안심센터 연계)
복지용구 대여 및 구입 지원
가족 상담 및 교육 정보 제공
가족이 객관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제안을 하면,
감정 대신 현실적인 논의가 가능하다.
“엄마, 의사 선생님이 필요하대요”보다
“이걸 신청하면 도와주는 사람이 생긴대요”가 더 설득력이 있다.
“말을 꺼내야 길이 보입니다.”
치매는 가족의 문제이지만, 가족만의 문제는 아니다.
돌봄 초입에 많은 가족이 혼자 끌어안다 지친다.
그 무너짐을 늦추려면, 첫 대화에서 ‘책임’보다 ‘함께’라는 단어를 꺼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첫 문장을 꺼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