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서 힘든 사람들에게 – 돌봄과 죄책감 사이에서

나는 부모님의 간병인이 아니다.

by 순시미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는 일이, 왜 가장 힘들까.
오늘 하루도 누군가는 가족의 상태를 살피느라 회의 시간을 조정하고, 점심시간엔 병원에 다녀올 사람을 걱정하고, 퇴근길에는 장기요양등급 신청서를 다시 들여다봤을지도 모른다.

사랑해서 시작했지만, 어느새 사랑이 짐이 되어버리는 순간들.
돌봄은 왜 이렇게 쉽게 ‘혼자만의 책임’이 될까?




혼자 감당하는 돌봄의 무게

“나는 아무것도 못 하고 하루를 끝냈다. 그런데도 너무 지쳤다.”


수진씨 이야기

20대 초반에 막 취업한 수진 씨는 1년 반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이유는 아버지의 간병이었다.

퇴근 후 병원으로 달려가고, 밤새 낙상 방지에 신경 쓰고, 아침마다 약을 챙기고 출근하던 삶.

하루하루가 파김치였다. 결국 직장을 내려놓았다.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요. 아버지를 모른 척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요."

말은 담담했지만, 표정은 무너져 있었다.

그녀는 이제 간병인이 되어 있었다. 직업도, 꿈도, 인간관계도, 점점 사라진다.


민석씨 이야기

민석 씨는 40대 중반의 회사원이다.

싱글이고, 어머니와 단둘이 산다.

어머니는 만성질환으로 2주에 한 번 외래 진료를 가야 한다.

그날마다 민석 씨는 연차를 쓴다.

동료들은 이유를 묻지 않지만, 눈치가 보인다.

휴가도 못 가는 그는 “부모님을 모신다는 게 이런 거였나”라는 생각이 점점 무거워진다.

“돌보는 건 당연한 일”이라며 스스로를 다잡지만, 점점 쌓이는 피로와 죄책감이 그를 짓누른다.

“내가 좀 더 효자였다면,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 텐데…”


영주씨 이야기

결혼 후 3년, 영주 씨는 시어머니의 간병인이 되었다.

가벼운 치매로 시작된 증상은 점점 깊어졌고, 시댁과 가까이 산다는 이유로 모든 돌봄이 그녀에게 몰렸다.

남편은 출근이 빠르고 퇴근이 늦다.

형제들은 멀리 산다.

그녀는 매일 시어머니의 약을 챙기고, 낙상 위험을 살피며, 병원과 요양센터를 오간다.

아이의 숙제는 뒤로 밀리고, 자신의 커리어는 멈췄다.

그러다 어느 날, 거울을 보았다.

“내가 여기 있기는 한 걸까?”



우리는 왜 죄책감을 느끼는가

"사랑하지만, 혼자 감당하긴 너무 버겁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죄책감’이다.

부모님을, 시어머니를, 가족을 더 잘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

돌봄을 힘들어하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

“사랑하는데 왜 이렇게 힘들까”라는 죄책감.


그러나 이 죄책감의 근원은, 가족 돌봄이 당연한 사회적 기대에 있다.

우리는 돌봄을 사랑으로 포장하지만, 실제로는 하루 24시간을 갈아 넣는 노동인 동시에,

물리적, 감정적, 경제적 자원이 지속적으로 투입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사랑과 돌봄 사이, 경계를 그릴 권리

“나는 부모의 간병인이 아닙니다.”


이 말은 사랑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돌봄의 전문화가 필요하다는 외침이다.

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지만, 돌봄의 전부를 책임질 필요는 없다.

내 삶도 존중받아야 한다.


간병은 가족이 혼자 짊어질 짐이 아니다.

국가가, 지역사회가, 그리고 전문 돌봄 서비스가 함께해야 하는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능한 제도와 서비스들

장기요양등급을 신청하고, 요양보호사와의 협업을 통해 부담을 나누는 것

외래 진료 동행을 가족이 아닌 돌봄 전문가와 연결하는 서비스

감정적 피로를 나눌 수 있는 가족상담이나 또래 지원 커뮤니티

그리고, ‘나도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



가족을 돌본다는 것, 내가 무너지는 방식이어선 안 된다

“돌봄의 경계, 그리고 함께할 수 있는 선택들” 이후


수진씨 이야기

“아버지는 요양보호사와 산책을 나가고, 저는 제 일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수진 씨는 인터넷을 통해 ‘장기요양등급’ 제도를 알게 되었고, 순시미 재가복지센터장의 도움을 받아 5등급을 받았다.

이후 요양보호사가 정기적으로 집에 방문해 식사 보조, 외출 동행, 위생 관리를 도와주었고, 수진 씨는 재취업을 준비하며 조금씩 자신의 삶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민석씨 이야기

“병원 동행을 맡길 수 있어, 드디어 마음 편히 회의를 잡을 수 있었어요.”

민석 씨는 프리미엄 돌봄 플랫폼을 통해 정기 외래일에 맞춘 케어 매니저를 찾았다. 그는 당일 진료 결과만 확인하고, 어머니는 간호사 출신의 익숙한 케어 매니저와 함께 병원에 다녀올 수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서비스가 있었는데, 제가 몰랐던 거예요.”


영주씨 이야기

“가족회의와 간병계획서를 쓰면서 감정의 방향이 정리됐어요.”

영주 씨는 보건소 치매안심센터에서 상담을 받은 뒤, 가족 상담 프로그램과 사례관리 서비스를 연계받았다.

또 지역 사회복지관에서 ‘시부모 돌봄 책임조율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남편과의 대화도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간병을 더 이상 혼자 짊어지지 않는다.

“누구보다 내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는 게 시작이었어요.”




돌보는 사람에게도 돌봄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가족돌봄자의 64%는 여성이고, 그중 절반 이상이 40~60대라고 한다.
퇴직, 이직, 관계 단절은 가족을 돌보는 과정에서 너무 흔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그런 선택 뒤에는 종종 ‘내가 아니면 안 되니까’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자.


‘가족을 돌보는 일은 정말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일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