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가 손해가 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우리는 모두 늙어간다.
하지만 '늙는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별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
사회도, 나도, 그리고 당신도.
퇴근길, 비가 내렸다.
우산을 쓰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길에, 세 분의 어르신을 보았다.
허리가 굽은 할머님 한 분은 성인 보행카를 밀고 천천히 걸으셨고, 그 옆엔 연세 지긋한 남성분이 조심스럽게 우산을 받쳐드리고 있었다. 아드님일까, 가족일까. 몇 걸음 앞에는 또 다른 할머니가 그들을 돌아보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비를 그대로 맞고 계셨다.
들고 있던 우산을 할머니께 건넸다.
할머니는 그냥은 받으실 수 없다며 우산 값을 내겠다 하시다가 나중에 돌려주도록 연락처를 받으시곤 겨우 우산을 받으셨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문자가 왔다.
오늘
검정우산 감사합니다.
우산도 돌려드리고
6월의
어느 한 주말에
식당에서의
점심식사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제가 6월 15일 이후
전화드린 후
조 선생님의
가능한 시간을
여쭈어 보고자 합니다.
어머님과
저에게 베풀어주신
선량한 덕을
잊지 않겠습니다.
오늘 정말 고마웠습니다.
건강하셔야 합니다.
과하게 느껴지는 인사에 감사하면서도,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과연 특별한 일을 한 걸까?
일 년 전, 아버지 병원 외래에 가는 날이었다.
평소처럼 택시를 타려 했는데, 아버지가 굳이 버스를 타자고 했다.
“바로 가는 버스가 있어. 굳이 돈 들일 필요 없지.”
병원 갈 때마다 병원비에 약값까지 돈 들어가는 딸 걱정에 교통비라도 아끼고자 하는 것 같았다. 고집에 못 이겨 알겠다고 하고 버스를 탔다.
딱 아침 출근길 시간, 버스는 붐볐다.
자리를 잡지 못한 아버지는 손잡이를 붙잡고 힘겹게 서 계셨고, 버스가 울렁일 때마다 아버지도 함께 흔들렸다.
아무도 아버지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출근길 모두가 힘들다는 것도, 자리를 양보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기에 택시를 타지 않은 스스로를 탓했다.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사람들은 잘못하지 않았다. 노약자를 데리고 버스를 탄 보호자의 잘못이었다.
그날 버스 안에서 느꼈던 무력감은, 마음 한구석에 깊게 남았다.
지하철엔 노약자석이 있다.
노약자석은 노약자를 위해 비워져 있곤 하지만, 그 외에 자리에서의 양보는 잘 없다. 배려로 만든 노약자석이 노약자 지역이 된 것만 같다.
노인 정책도, 보호구역도 있다.
하지만 정작 ‘존중’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면, 그건 내 착각일까?
노인을 위한 자리는 있지만, 노인을 위한 사회는 없는 거 아닐까?
나도 언젠가 또 다른 비 오는 날에, 우산 없이 걸어갈 수 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 손잡이를 잡고 서 있을 수도 있다.
지금은 사소해 보이는 불편들이, 언젠가 위험이 될지도 모른다.
비를 맞고 감기에 걸려 크게 고생하거나,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버티지 못하고 넘어질 수 있다.
그때도 우산을 챙기지 않고, 택시를 타지 않은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 만나게 될 사회는, 어떤 모습일 까.
지금 우리는, 노인을 위한 자리를 만들었을 뿐
노인을 위한 사회를 만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