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훈 없는 세상,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알려주는 어른이 없었다
EBS <지식채널e – 젊은 간병인의 슬픔>을 보았다.
조부모와 치매 어머니를 돌보던 청년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고, 사람들은 되묻는다.
“왜 가난과 불행을 입증하지 않았냐”라고.
그 장면에서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떠올랐다.
몸이 불편한 할머니를 부양하던 이지안에게, 박동훈 부장이 말해준다.
“손녀는 필수 부양의무가 없어.”
그제야 이지안은 할머니를 요양시설에 모시고, 할머니와 함께 눈물을 흘린다.
그런 제도가 있는 줄 몰랐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박동훈은 이지안 세계의 첫 번째 ‘어른’이었다.
경제적으로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에게,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버린 사람들에게,
복지는 스스로 다가오지 않는다.
세금은 자동으로 공제되지만, 복지는 스스로 찾아 증명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복지는 철저히 신청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신청하세요.
알아서 챙겨주지는 않습니다.”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정보를 먼저 아는 사람”,
“공공기관에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
“서류를 챙기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국가의 제도는 존재하지만,
그 문을 두드리는 일부터는 개인의 몫이다.
정보를 검색하고, 자격요건을 해석하고, 전화를 걸고,
상담을 요청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도움은 시작된다.
드라마 속 이지안은
조금씩 다른 얼굴로 우리 곁에 살아가고 있다.
돌봄은 예고 없이 시작되지만,
제도는 조용히 숨어 있다.
누구도 먼저 알려주지 않고,
모르면 못 받는 것이 지금의 복지다.
“제도가 있는데 왜 몰랐어?”
“요즘은 다 검색하면 나와.”
이런 말을 들으면 한숨부터 나온다.
도움을 ‘찾을 여력’조차 없다.
오늘 하루도 벅차고, 다가오는 내일이 두렵다.
하지만 사회는 늘,
제도를 찾지 못한 사람을 탓할 뿐이다.
<나의 아저씨>의 박동훈이
판타지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단 한 마디,
그 정보가 없어서
누군가는 삶에 짓눌려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살아간다.
삶이 감당할 수 없는 숙제처럼 느껴지는 날들.
그 옆에 누군가,
“이런 제도가 있어요.”
“당신은 이 조건에 해당돼요.”
“신청은 여기, 순서는 이렇게 하시면 돼요.”
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다를까.
진로상담교사처럼,
나의 상황을 함께 살펴보고
선택지를 안내해 주는 어른.
처음 듣는 단어에 당황해 헤매지 않도록
가이드를 해주는 사람.
왜 그런 사람은 없는 걸까.
어른인 나도, 복지가 어렵다.
제도를 설명하는 기준을 이해하려면
한참을 곱씹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해당이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기관도 다르고, 담당자도 다르고,
신청 방법도 제도마다 다르다.
하나하나 공부하고,
내게 해당되는지 따져보고,
신청서를 작성하고,
자료를 제출하는 데에는
상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박동훈’을 사회에 배치해야 한다.
우리 옆에 앉아
필요한 제도와 방법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
‘복지 안내자’,
‘돌봄 큐레이터’라는 직업이
이제는 현실이 되어야 한다.
제도를 만들었다면,
‘알려주는 일’도 제도의 일부여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감시자가 아니라
길잡이다.
우리는 여전히
‘알려주는 어른’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