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여러개
"조차장님, 방금 사장님이랑 카톡 했어요?"
이사님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이사님과 사장님은 유럽 출장 중이셨다.
"네. 지시하신 게 있어서요. 무슨 일 있으세요?"
"그렇구나. 아니, 사장님 카카오톡에 조차장이 뭘로 저장됐는지 알아요?"
"글쎄요. 뭐라고 저장됐는데요?"
"우리회사 함안댁."
"........"
"아니, 함안댁이랑 카톡을 주고받길래 누군가 했는데, 어쩐지 조차장일 것 같아서."
다정하신 이사님의 밀고에 할 말을 잃었다. 함안댁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 등장인물로 중년의 여자 노비이다. 주인공을 애신을 돕는 조력자로 선한 역할이긴 하지만, 유쾌한 소식은 아니었다. 친한 사이끼리는 별명으로도 저장하는 것이 카카오톡 이름이지만, 상대는 사장님. 사장님이 나를 노비 이름으로 저장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이사님한테 나의 분노와 충격은 주요 쟁점이 아니었다. 이사님이 이 이야기를 내게 꺼낸 것은, 본인을 배우 김태리 분이 연기한 '고애신'으로 가정하고, 주변 사람들을 고애신의 주변인물로 저장했다는 것이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사장님의 변은 이러했다.
"신분을 떠나서 드라마를 보며 '함안댁'이라는 인물을 참 좋아했다. 내 주위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할 정도였다. 그래서 조차장을 그렇게 저장한 것인데, 기분이 나빴다고 하니 사과하겠다. 하지만 나도 서운하다."
노비라는 것은 전혀 생각 안 하고 그저 좋아하는 캐릭터로 이름을 저장한 것뿐인데 내가 과민 반응을 한 것이었다. 사장님이 해명과 사과까지 하셨는데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한동안 TV에 이정은 배우분이 나올 때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내가 별 것도 아닌 일에 '노비'에 초점을 맞추어 과민하게 반응한 걸까.
사장님 입장에서 나는 상습적 오해꾼이다.
몇 해 전 이야기이다.
회식 중에 사장님이 "계륵이라고 아냐?"라고 물으셨다. 나를 보면 '계륵'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사장님이 주시는 소주잔을 받다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싶어 대답 없이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 사장님의 '해명'을 듣게 되었다. '계륵'이 가진 뜻으로 내가 떠오른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 속에서 조조의 말을 단박에 알아들은 장수 '양수'생각이 난다는 뜻이었다며, 그만큼 내가 말귀를 잘 알아듣고 눈치가 빠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 후 조조는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양수를 참수시켰다. 사장님의 해명을 듣고, 나는 계륵과 양수 중 어느 쪽에 빗대어진 것이 더 나은 것인지 헷갈렸다.
최근 우리 회사는 조직개편을 하였다.
적은 인원으로 필요한 업무들을 모두 처리해야 하므로, 직무 범위가 넓어지는 것은 직급이 올라갈수록 해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한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부서가 필요해졌고, 그때마다 나는 팀이 바뀌었다. 올해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직개편을 앞두고 사장님과 개인면담을 했다. 그 간의 부서 이동과 사업 변화에 대해 말씀을 하시다가 별안간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도 너, 내 가방모찌 하던 시절이 제일 좋지 않았냐? 내가 지금 제대로 된 가방모찌가 없어서 고생이다."
'가방모찌가 뭐지?' 어렴풋하게 사장님이 예전에 퇴사하는 직원에게 분노하며, '내 가방모찌나 하던 새끼가!!'라고 표현하던 것이 기억났다.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좋은 건 아닌 것 같아서 검색을 해보았다.
'가방모찌'는 '어떤 사람의 가방을 대신 메고 다니면서 시중을 드는 사람'을 지칭하는 일본어 표현이었다.
머리속에서 어떤 선이 주욱 그어졌다. 이래서 실마리라고 하는구나. 하나하나의 표현들이 주욱 이어져서 패턴을 이루었다.
함안댁, 계륵, 가방모찌
이러니 오해가 깊어질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