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나면 티 나는 청소가 좋아
어제 저녁 며칠전부터 벼르던 냉장고 대청소를 끝냈다. 음식 쓰레기까지 내놓고 오니 거의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깨끗하게 정리된 냉장고를 보니 기분이 한결 가볍다.
나는 정리 정돈을 잘 하는 타입은 아니다. 옷이나 다른 건 그래도 괜찮은 편인데 유난히 종이류를 잘 정리하지 못한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책상엔 프린트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편이다. 그러다 쫌 높아졌다 싶으면 어딘가 서랍 속으로 옮겨 놓는다. 우선 겉으로 보이지 않게 피신시켜놓는 것이다 ^^;;; 종이니까 그냥 집어서 어딘가에 넣어놓기만 하면 된다. 이런 종이류들은 맘 먹고 날 잡아서 하나하나 펼쳐본 후 분리하고 파쇄하는 공을 들여야 하는데, 요즘 나는 그 정도의 정성을 쏟을 시간도, 에너지도 없다.
그래서 서랍에 넣었다.
쓰면서 떠오른 건데, 종이 정리가 유독 어려운 이유는 실수로 개인 정보가 적힌 종이를 버리게 될까봐, 또 논문이나 자료를 출력해놓은 건 언젠가 읽을 수도 있단 생각에서 못 버리고, 애들이 제출한 과제도 언제 또 필요할지 모르니 계속 쌓아두게 되는 거 같다.
집안일은 조금만 신경을 안쓰면 일상을 망쳐놓는데, 안하면 그렇게 티가 팍팍 나면서 하고난 뒤엔 별로 티가 나지 않는다. 쓸고 닦고 해도 그냥 보통의 날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는 정도니 눈에 띄는 변화는 잘 느끼지 못한다. 해서 티가 나는 게 아니고, 안하면 불편하고 티가 나는 그런 일에 가까우니 억지로 또 동기 부여를 해야만 하는 일이다.
내가 집안 일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내적 가치를 찾는 타입은 아닌지라, 그저 필요와 그럭저럭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하는 것인지라 동기 부여가 되려면 즉각적이고 외적인 산물이 필요하다. 집안일의 성격에 따라서 티가 나는 것도 있고, 나는 즉각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그런 일을 좋아한다. 그래서 냉장고 청소를 좋아한다. 냉장고를 정리하면 빨래나 청소 같은 걸 했을 때랑 기분이 쫌 다르다. 냉장고 문을 열때마다 한눈에 정리된 게 보이니까 내 노력이 보상받는 기분이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냉장고 안의 반찬과 재료들을 다 끄집어낸다.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
냉장고를 정리한 뒤엔 간식으로 먹을 감자와 달걀을 삶아두었다. 감자와 달걀은 내가 무척 좋아라~ 하는 건데, 사실 거의 매일 요만큼씩은 먹는다. 한번에 달걀을 하나만 먹는 건 아쉬워.. 후라이도 늘 두 개씩ㅡ
정리하다보면 잊고 있었던 식재료들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곤 이 아이들을 어떻게 처치할 것인지 며칠 간의 메뉴를 고민한다. 어제는 엄마가 보내준 무, 신문지로 고이 싸여진 채 야채칸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무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래서 무를 넣어 갈치조림을 만들었고, 오늘 아침 오랜만에 생선 요리를 먹고 출근했다. 내일은 연근을 어떻게 활용해볼까 고민 중이다. 당분간 장 보지 않고 냉장고 파먹기를 해야겠다.
고향 집 주변이 다 연늪이라서 어릴 때 연근과 연자육을 정말 많이 먹었다. 연근 조림이나 부침개도 있지만, 내 추억의 연근 요리는 그냥 그대로 삶아서 반으로 쪼개서 먹는 것이다. 삶기만 하면 되니까 요리랄 것도 없다. 근데 그 맛이 은근 달짝지근 괜찮다. 고향 동네는 슈퍼마켓이 없어서 과자 하나 사먹으려면 30분 정도 걸어나가야 하는 곳이라, 어린 시절 나의 간식은 지금으로 보면 초건강식이다.(산딸기, 삶은 연근, 콩, 고동, 집에서 키우던 구황작물. 삐끼라 부르던 풀과 아카시아 꽃도 먹었다. 온갖 것을 먹으면서도 메뚜기랑 개구리 안먹은 건 참 신기해)
삶은 연근을 반으로 쪼개면 그 사이에서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나와 먹을 때 거슬리기도 했지만, 문득 달짝지근 담백한 그 맛이 그리워져서 내일은 감자 대신 연근을 삶기로 한다.
동생들과 함께 살 땐 집안일을 종류별로 나누어서 했다. 초창기엔 싸우기도 했으나, 니가 했니 내가 했니 누가 더 많이 했니 따지는 게 싫어서 그냥 역할 분담으로 깔끔하게 다툼이 종결되었다.
나는 보통 남편들이 많이 하는(안 그런 집도 많겠지만) 쓰레기 버리기, 욕실과 화장실 청소 담당이었다. 이전의 글에서 썼듯 집에서 그다지 권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동생이 하기 싫다는 걸 내가 주로 했다. 고등학생땐 내가 도시락 담당이었는데, 다 큰 뒤엔 동생의 요리 실력이 월등한 관계로 동생이 요리를 하고 나는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도 뭔가 더러운 게 씻겨나가는 느낌이 좋아서 선호하는 집안일에 속한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내가 가장 하기 싫은 집안 일은..
빨래를 건조대에 너는 것이다.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다 마른 빨래를 개는 건 괜찮은데 이상하게 탈수가 완료된 빨래를 꺼내 널어놓는 게 너무 귀찮다. 왜 그럴까? 생각할수록 궁금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