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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냄새 Sep 04. 2022

이 이상은 가사로 쓸 수 없어

산울림부터 스핏츠까지, 내가 좋아하는 노랫말

음악을 들을 때 리듬이나 멜로디에 집중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처럼 가사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나는 들었을 때 느낌이 좋았던 곡은 꼭 노랫말을 찾아본다. 최근엔 퇴근 길에 라디오를 듣다 이치현과 벗님들의 <다 가기 전에>라는 곡의 노랫말에 꽂히기도 했다. 서정적인 가사를 좋아하다보니 상대적으로 옛날 노래를 좋아하는 편^^ (잔나비나 가을 방학 같은 인디 밴드를 좋아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컸을 거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노랫말을 소개해 보기로^^


# 산울림 <더, 더, 더>

<너의 의미>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산울림의 곡.

고등학교 2학년 때 드라마에 삽입된 <회상>이란 곡을 찾아보다 <개구쟁이>의 아저씨가 이렇게나 목소리가 좋고, 아름다운 노랫말을 많이 썼단 걸 알게 되었다. 그 후 나의 베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산울림. 특히 기교가 없는 담백한 목소리와 창법을 좋아하는 나는 김창완씨의 목소리가 참 좋다. spitz의 <사랑의 노래>가 힘들거나 슬플 때 듣는 노래라면, <더, 더, 더>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불러주고 싶은 노래다. 노랫말은 단순하지만,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더 오래 함께 하고픈 마음이 잘 느껴진다. 그 중 내가 특히 좋아하는 건 바로 요 부분^^


그냥 앉아있어요 지금 만난 것처럼

조금만 더, 더, 더


# 잔나비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잔나비의 많은 곡을 좋아하지만, 처음 듣자마자 아, 어쩜 노랫말이 이래? 라고 했던 건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였다. 나는 읽기 쉬운 맘이야~ 로 시작하는 도입부와 보컬의 목소리도 좋지만, 가장 콕! 박힌 가사는 바로 이 구절. 헤어지는 순간이 온대도 서둘러 뒤돌지 말고, 서로의 안녕을 보자는 말. 이 말이 너무 애틋했다. 사귈 때, 처음 만나기 시작할 때 그렇게 좋아서 만났는데, 언젠가 그 마음이 다 해 헤어지는 순간이 온다 해도 서로의 안녕을 빌어줄 수 있다면. (물론 원망과 미움도 있겠지만, 궁극엔 안녕을 빌어주고 싶을 듯. 그 사람이 불행해서 내게 좋을 게 뭐가 있을까.) 더구나 이 가사는 헤어지는 순간에 서로 마주보며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상상하게 해줘서 더, 더, 더 좋다.


언젠가 또 그날이 온대도 우린 서둘러 뒤돌지 말아요

마주보던 그대로 뒷걸음치면서 서로의 안녕을 보아요


# 가을 방학 <클로버>

내 휴대 전화의 컬러링은 거의 10년 가까이 가을 방학의 <속아도 꿈결>이다. 내가 나에게 전화를 거는 게 아니니까 굳이 다른 곡으로 바꿀 이유도 없거니와 오랫동안 가을방학의 노래, 계피의 목소리를 좋아했기 때문에. 덕분에 처음 전화하는 사람들로부터 컬러링이 산뜻하다거나 좋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이 밴드의 곡들은 노랫말이 다 이쁘지만 특히 더 좋아하는 건, <클로버>란 곡이다. (마지막까지 <한낮의 천문학>과 <이브나>가 후보에 있었다. 꼭 한 밴드에서 하나만 골라야 하는 것도 아닌데, 쓰다보니 마치 그런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 과정에서 내가 슬프고 가슴 절절한 그런 가사보다 밝고 설렘 가득한 곡의 분위기를 더 좋아한단 것도 깨달았다.) 왜 제목이 클로버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입부의 산뜻한 분위기 + 내가 어디 있든 네게 돌아갈 거니까, 내가 있는 곳은 네가 다 아는 곳이니까 당장 곁에 없어도 놀라거나 힘들어하지 말라고 안심시켜주는 노랫말이 참 따뜻해. 잠든 애인의 옆에 햇빛을 얹어둔다거나 제일 이쁜 무지개를 얹어둔다거나 하는 마음도 너무 이뻐.


눈을 떴을 때 내가 없어도 너무 놀라지는 마

네가 아는 곳이야 내가 있는 곳

아님 저번에 갔던 그때 거기

My love 잠이 든 네 베개 옆에

노란 햇빛 한 웅큼을 얹어두었어


아쉬운 마음에 <한낮의 천문학>의 가사도 결국 가져옴

ㅋㅋㅋ


낯선 그대가 내게 퍼붓는 질문들

겸손한 학생의 눈빛으로

천문학자가 밤을 기다리듯 조금만 시간을 가져요


# 안녕하신가영 <좋아하는 마음>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는 계피, 아이유, 안녕하신가영.. 같은 타입인데 (물론 라디오 진행할 때 유인나씨의 그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도 진짜 좋아함^^), 이 분 노래도 가사가 이쁘다. <언젠가 설명이 필요한 밤>으로 입문해서 지금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좋아하는 마음>. 좋아한다는 말을 자꾸 하면 그 진심이 가볍게 느껴질까봐 염려하며 그런 말보다 마음 먼저 생각해달라는 고백.


좋아한다는 말보다

좋아하는 마음 먼저

생각한다는 말보다

네가 먼저 생각이 나

보고싶다는 말보다

우연히 너를 보여줘


# 9와 숫자들 <높은 마음>

한 때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꽉 채웠던 9와 숫자들의 노래. 비 오는 저녁 홍대 뒷골목에서 봤던 콘서트가 떠올랐다. 한동안 잘 듣지 않았지만, 이쁜 노랫말을 생각하니 <높은 마음>도 있었다. 아무리 애써도 별로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인생이라도, 남들은 다 궁금해하지 않는다 해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조금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 근데 우리가 누군가를 정말 좋아하면 그 사람은 자연스레 특별해지지 않나. <너의 의미>에서처럼 한 마디 말도 큰 의미가 되고, 스쳐 지나갈 법한 것도 눈에 확 들어오고, 엄청 잘 부르는 노래나 화려한 댄스 실력보다 어설프고 실수투성이인 게 더 좋아보이고. 그러니 아무도 찾지 않는 연극, 조연의 얘기라도 그 사람에게만은 몇번씩 다시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얘기가 되겠지.


몸부림을 쳐봐도 이게 다일 지도 몰라

아무도 찾지 않는 연극

그 속에서도 조연인 내 얘긴

그래도 조금은 나 특별하고 싶은데

지금 그대와 같이 아름다운 사람 앞에선


# 아이유 <밤 편지>

아이유 노래 중에선 <무릎>을 가장 즐겨 듣고 또 부르지만, 가사가 가장 좋았던 곡은 <밤 편지>였다. 어쩌면 아이유가 해준 이야기가 와 닿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늦게까지 잠을 잘 못자는 편이고, 잠이 무척 중요한 사람인데, 어느 잠못드는 늦은 밤 상대가 보고 싶을 때, 전화를 걸면 그 사람의 잠을 깨우게 될까봐.. 전화해서 보고 싶다거나 사랑한다고 말하는 대신, 그 사람이 정말 좋은 잠을 잘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잠을 깨우지 않을 정도로 작지만 따뜻한 반딧불을 보내는 거라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 진짜 많이 사랑하는 거구나, 싶어서.. 유독 그 노랫말이 애틋하고 아름답게 들렸다. 내 마음보다 그 사람의 안녕과 편안한 밤을 빌어주는 마음, 배려심이 느껴져서 좋다.


이 밤 그날의 반딧불을

당신의 창 가까이 보낼게요

음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 이정열 <그대 고운 내 사랑>

어릴 때 결혼식에 참석할 때면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어떤 노래를 축가로 듣고 싶은가^^(드레스나 결혼식 자체에 대한 로망은 없어서, 사실 둘이 조용한 바닷가 같은 데서 약속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하면서 축가는 고민해봤다니 ㅋㅋㅋㅋㅋ) 이승환의 <화려하지 않은 고백>이나 김광석의 <내 사람이여>가 오래 후보에 있었으나, 노랫말은 이정열의 이 노래가 더 와닿는다. 가시나무 숲이 서걱이는 마음, 그런데 그런 자신의 마음을 치우고 상대방을 쉬게 해주고 싶다는 바람. 사랑 노래라 그런가 다 왜 이렇게 맘이 이쁜 건지. 평소 이 곡을 자주 듣진 않지만, 결혼할 상대에게 듣는다면 벅차서 울어버릴지도.

(서로가 이런 마음이면 아주 바람직하겠지^^)


그대 짊어진 삶의 무게 가늠하지 못해

오늘도 나는 이렇게 외로워하지만

가시나무 숲 서걱이던 내 가슴 치우고

그대를 쉬게 하고 싶어 내 귀한 사람아


# spitz <바다와 핑크>

스핏츠의 노래야 뭐, 워낙 마사무네가 시인 같다는 말을 들을만큼 이쁜 말을 쓰니까 (그래서 마사무네를 좋아하고, 스핏츠를 좋아하지.) 어느 하나를 고르기가 힘들다. 사실 평범한 것 같은데 미묘한 감동이 있어서ㅡ 죽을만큼 널 사랑해, 이런 스타일이 아니라서 오래 들어도 질리지 않고 계속 그 의미를 생각하게 되는 게 좋다.

그래서 그냥 오늘의 픽^^ <바다와 핑크>를 골랐다. (다른 날엔 다른 곡을 고르게 될지도 몰라 ㅎㅎ) 밝고 경쾌한 리듬, 바닷가에서 장난을 치다가 잠깐 서로를 보다가 하품을 하는 편안하고 한적한 오후의 한 때ㅡ 이건 계속 이미지를 상상하게 되어서 나도 모르게 미소 짓게 된다.


조그마한 자갈들이

발바닥을 간질이는 해안에서

잠깐 당신을 보고

바다를 보고

하품을 하고

Chu...


마사무네가 <사랑을 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恋する凡人)>이란 곡에서 의미 따윈 어떻게 되겠지, 이젠 힘으로도 막을 수 없어,, 라며 사랑에 빠진 순간의 무력감을 노래하다 맨 마지막에 이제 “ 이 이상은 가사로 쓸 수 없어 “라고 하는데, 이게 아마 진짜이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더 이상 내 마음을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는 거.



뭘 듣다가 좋으면 “ 지금 그거 가사 뭐야? “ 라고 묻는 나에게 누군가 그랬다. 진짜 음악을 좋아한다기보다 오히려 글과 스토리를 좋아하는 것 아니냐고. 음.. 그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치만 내가 어떤 음악을 듣고 가장 많이 울었던 때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씨가 연주한 바흐의 <샤콘느>를 들었던 순간이었다. 그 날은 아무 일도 없던 평범한 저녁이었다. 다른 노래는 가사를 들으며 어떤 이미지나 이야기, 추억 같은 게 떠올라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데, 이 곡은 그냥 아무 생각도 없이 마구마구 눈물이 흘러서 나도 깜짝 놀랬다. 이유를 알 수 없는데,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에서 슬픔이 밀려왔다. 나중엔 펑펑 울었는데, 그러고나자 마음 한구석이 씻겨나간 듯 말끔해졌다. 다 듣고 찾아보니 바흐가 죽은 아내를 위해 만든 곡이라고.


https://youtube.com/watch?v=1F7c8zIhBGg&feature=share


시작은 내가 음악을 들을 때 가사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거였는데, 마지막은 ‘말이나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마음’, 그리고 그걸 전해주는 음악이 되어버렸다.


아,

난 노랫말이 중요하다고 쓴 거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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